중학교 기술 시간. 살고 싶은 집 도면 그리기가 숙제로 주어졌다. 나는 열심히 생각했다. 네모난 집안에 방을 몇 개 만들고 가구를 요리조리 배치했다. 나는 내 방이 꽤 맘에 들었다. 선심 쓰듯 엄마 부엌도 크게 만들고 아빠 책방도 멋지게 만들었다. 숙제 제출 날. 아이들의 숙제를 모두 보신 선생님 얼굴이 어둡다.
"모두 외관이 네모구나. 집 모양도 방 모양도 모두 네모야."
아직도 이 수업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나는 꽤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우리 반 어떤 아이도 세모난 집이나 사다리꼴 집을 가진이가 없었다. 자부했던 내 상상력은 흔해빠진 집과 같이 평범해졌다.
내가 기억하는 집은 꽤 많다. 할아버지 집은 한옥이었고 외할아버지 집은 주택이었다. 이모집은 상가주택이었고 우리 집 또한 여러 아파트를 지났다. 아이들의 집은 어떠한가. 아이들이 아는 집은 오직 아파트다. 아이가 아는 친척 대부분이 아파트에 산다.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삼촌도 네모난 방안에 네모난 창문을 가진 건물에 산다. 세상에 다양한 집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다.
코로나가 시작되며 마당 있는 집을 꿈꾸게 되었다. 층간소음 때문에 8살 10살 된 아이들은 까치발을 하고 걷는다. 그것도 모자라 폭신한 실내화를 챙겨 신고,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은 앉아 지낸다. 외출이 쉬웠을 적엔 이 또한 걱정이 아니었다. 대부분 야외에서 시간을 보냈던 우리 가족은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났다. 하루 종일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어 아래층 집에 빵과 편지를 주고 오기도 몇 차례. 나는 집을 빌려 쓸 수 있는 에어비앤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남편 회사는 여름에 2주간 휴가가 있다. 연초에 휴가날짜가 지정되기에 계획 짜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우리는 에어비앤비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텔을 생각했다. 하지만 좁은 방과 세탁이 어렵다는 점은 우리 가족에게 맞지 않았다. 단독으로 쓸만한 집을 알아보았다. 에어비앤비에는 다양한 집이 존재했다. 아파트도 빌라도 주택도 모두 빌릴 수 있었다. 몇 날을 검색하다 결국 집을 골랐다. (에어비앤비는 다양한 숙소를 예약할 수 있는 앱이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 숙소는 오름아래 잔디가 예쁜 작은 집이었다. 아이들은 마당 있는 집에서 해방된 듯 즐거워했다. 세끼 해먹는 집에서와 같은 일상이었지만 "뛰지 말아라. 소리 지르지 말자" 이 말만 안 해도 피로도가 반은 주는 것 같았다. 내복 입고도 나갈 수 있는 외부공간. 아이들은 마당을 특히 좋아했다. 눈뜨기 시작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당에서 즐거이 놀았다. 마침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가 있어 아이들은 매일 고양이를 보느라 바빴다.
이른 아침엔 산책을 나갔다. 마을은 주민들의 거주지였다. 여행하면 따라오는 관광객들의 흥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제주도민이 된 것처럼 편안히 입고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아직 풀도 나무도 잘 시간이라 일러주었더니 아이들은 골목길을 조용히 걸었다. 성산일출봉도 한라산도 가지 않았던 여름휴가였지만, 어느 때보다 제주도를 온전히 느꼈던 시간이었다.
다음 숙소는 다락방이 있는 빌라였다. 네모난 천장만을 보고 살아왔던 아이들은 이 공간을 아주 사랑했다. 벽에 빔을 쏴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다. 아이들은 부엌이 있는 밑층으로는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높은 계단도 놀이 삼아 오르락내리락했다. 밤에는 다락방 천장에 뚫린 창으로 별을 봤다. 쏟아지는 별까지는 아니었지만 비스듬한 창문으로 달빛이 기울어져 들어왔다. "달빛이 안개처럼 내려와요" 잡힐 것 같은 달빛에 손을 대보며 아이들의 밤은 행복했다.
우리는 다음 해에도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전통집을 숙소로 개조한 곳이었다. 돌로 담장이 쳐져있었다. 집안은 좁고 낮았다. 불편했지만 아이들에겐 이 또한 재미였다. 부엌과 연결된 문을 열면 뒷마당이 나왔다. 앞문을 열면 앞뜰과 연결되어 있었다. 현관문 한 개인 곳에 살던 아이들은 나갈 수 있는 문이 많아지자 신이 났다. 숨바꼭질하듯 이문으로 나갔다 저문으로 들며 웃었다. 아침에는 튜브 한 개씩 끼고 바다로 걸었다. 바다의 시간은 5시간도 짧았다. 해지기 직전까지 모래와 파도와 놀던 아이들은 집에 돌아와 이른 잠에 들었다. 관광 없이 바다만 오가고 실컷 쉰 우리의 휴가. 마당 앞에 핀 꽃들처럼 우리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요즘은 집값이 비싸 그저 몸 누일 곳만 있어도 만족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세상에는 다양한 집이 존재하지만 그중 어떤 집도 내 집이 될 것 같진 않아 꿈조차 접은 채 산다. 그래서 감히 추천해 본다. 가끔은 내가 살던 집과 다른 집에서 눈을 떠보자. 느지막이 일어나 골목을 산책하고 허름한 식당에서 따뜻한 한 끼를 해결해 보는 것도 좋겠다. 며칠 밤 낯선 집 낯선 곳에서 잠이 들면 네모난 건물처럼 각이 진 생각 모양이 조금은 바뀔 수 있을까?
다락방에서 좋아하는 만화책을 읽는 것. 바다가 보이는 창문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 지역 주민이 된 것처럼 전통시장 옆 아파트에서 묵어보는 것. 깊은 산속 끓는듯한 온돌방에서 아침을 맞아 보는 일. 모두 이뤄질 수 있는 꿈이다. 작은 돈으로 새로운 집을 꿈꿀 수 있는 사치. 여행으로 대리 만족해보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