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그림을 좋아한다. 지금은 관심이 조금 줄었지만 6살부터 2년간은 홀린 듯이 그림만 그렸다. 일어나자마자 시작한 그림은 잠들기 직전에야 끝이 났다. 아이가 흥미 있는 것 같아 학원을 다녀보기로 했다. 마침 유치원 바로 옆은 미술학원이었다.
아이의 상상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을 즐거이 지켜보았다. 아이가 그린 바다그림은 여백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차 있었다. 조개 더미에 조개들은 모두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구상할 것도 많고 그릴 것도 많은 아이는 한 개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두 달 다니던 아이는 생각보다 재미없다며 투덜였다. 선생님이 시키는 그림은 재미가 없다는 이유다. 미술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그림실력이 오르지 않아도 좋으니 즐겁게 그렸으면 좋겠어요. 원하는 주제로 원하는 만큼 그려도 될까요?" 선생님 한분이 꾸려가는 작은 학원이어서인지 수업에 자율성이 있었다. 선생님은 흔쾌히 받아주셨고 아이는 다시 그림에 재미를 붙였다. 학원가는 시간을 기다리는 걸 보며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제주 여행 중 화랑을 함께하는 소품샵 "키리코"에 갔다. 작가의 그림은 아이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술학원에서 흔히 보았던 화풍이 아니었다. 새로운 선과 다른 색감이 아이를 자극한 듯했다.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림이 여러 상품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다쟁이 아이는 말도 없이 작은 갤러리를 꼼꼼히 보고 또 보았다.
우리는 키리코에서 행복했던 협재 바다가 그려진 그림과 엽서 몇 장을 사 왔다. 사온 그림은 현관문과 방문 앞 부엌에 붙여두었다. 아이는 집을 오가며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그림이 바뀌기 시작했다.
긴 여행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제주를 대표하는 것들을 쭉 써 내려갔다. 한라산, 말, 한라봉, 해녀, 바다, 동백.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는 결심한 듯 눈을 반짝이고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큼직큼직했던 아이 그림 속 주인공은 사라지고 작은 등장인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의 작은 스케치북에 오른 큰 변화. 여행으로 얻은 값진 성과다.
새로 그린 그림은 제주 연작이 되어 아이 그림첩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생각나는 제일 좋아하는 시리즈가 되었다.
4년간 주말마다 아이들을 위해 박물관과 미술관을 닥치는 대로 다녔다. 차를 타고 한두 시간 거리도 마다하고 전시회도 다녔다. 아이들은 내 생각만큼 날뛰듯 좋아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실험을 볼 때나 그림을 만나면 번쩍이듯 관심이 일었지만 대부분은 지겨워하거나 건성건성 보았다. 그럴 때마다 힘이 빠지고 허무했다. 누구를 위한 일과였나 야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의 그림이 바뀌는 걸 보고 다시금 희망이 생겼다. 새로운 경험은 아이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니었을 뿐이다.
공부 대신 나들이만 다니는 우리 아이들은 주위의 걱정을 받곤 한다. 주말까지 학원을 다니는 아이 친구들을 볼 때면 내가 과연 맞는 건인가 고민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새로운 경험을 찾으러 다녀야겠다. 나만 느끼는 아이들의 미세한 변화가 이 생각을 유지시키는 힘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많은 경험들은 아이들 삶에 좋은 밑거름이 될 거라 믿는다.
"왜 그때 공부 안 시켰어!" 원망 들을 날이 올까? 그럴 때를 대비해 행복한 추억을 글로 남겨본다. 엄마 글이 그 즐거웠던 기억의 증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