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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y 27. 2022

산나물 파는 시장과
건어물 파는 시장

강원도 , 울산


강원도 철원군 백골부대. 비포장 도로가 끝나는 곳에 군인가족들을 위한 주거지가 있다. 5층짜리 아파트 3동과 관사 20여 채가 마주 보고 서있다. 아파트 앞 공터에 일주일에 두어 번 야채트럭이 왔다. 확성기 소리가 나면 엄마는 반가워하며 나갔다. 트럭 아저씨는 야채 사이에 앉으셔서 파, 양파, 감자를 솜씨 좋게 담아 주셨다. 미리 주문하면 말린 생선이나 계란도 챙겨 와 주셨다. 간단한 생활용품은 부대 내 PX를 이용했다.  


읍내에 열흘에 한번 장이 열렸다. 날짜의 끝에 ‘7' 숫자가 붙으면 열리는 장이었다. 트럭과 군대 매점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갔다. 

구불구불한 길을 낡은 차가 달린다. 반대편 차선으로 군용 트럭과 지프가 먼지를 일으키며 스쳐간다. 좁아진 길옆에는 큰 콘크리트 벽이 장승처럼 서 있다. 대전차 장애물이라고 불렸다. 전쟁 시 그 건물을 폭파하여, 남침하는 전차를 막아 두는 장애물로 쓰인다고 한다. 시내인 와수리로 가려면 이 이름도 무서운 콘크리트 건물을 4~5개는 지나야 했다. 차 안에는 바라볼 풍경도, 대화해줄 사람도 없었다. 어린 나는 창문에 기대 뻐끔뻐끔 금붕어처럼 시간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드디어 도착.  

마음이 바쁜 엄마의 걸음을 따라가느라 짧은 다리가 바삐 움직인다. 거리엔 용사의 집 같은 군장 용품점들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 가게 안은 패치와 명함들로 빼곡하다. 군복을 입은 아저씨들은 군복 무늬 가득한 가게에서 군 물품들을 산다. 어린 나는 아저씨들의 취향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아빠가 좋아하는 색을 아저씨들도 참 좋아한다고 말이다.
시외버스터미널 앞, 장병들을 태운 버스가 차례로 지나간다.

"엄마, 아저씨들은 왜 집에 안 가고 여기 있어?" 나는 질문한다.

"집에 가려고 여기 있는 거겠지"  바쁜 엄마는 걸음을 옮기며 건성으로 답해준다.

아저씨들의 집은 부대인 줄 알았던 나는 의아해한다.  드나드는 차가 많아지자 엄마가 내 손을 더 꽉 잡는다. 아프다 말할 새도 없다. 엄마와 나는 빠른 걸음으로 시장으로 들어선다.  

밝았던 태양이 알록달록한 천막에 가려진다. 색색의 천을 고개를 올려 바라보다 다시 앞을 보면 색의 잔상들이 눈앞에 남는다. 빛이 번지고 공 만한 색들이 잠시 눈앞을 스친다. 이상하게 보이는 걸 재밌어하며 몇 번씩 반복한다. 빨리빨리 안 따라오고 한자리에 서서 고갯짓을 하는 내 등 짝에 손바닥이 날아온다. 입을 삐죽이며 엄마와 걷는다.
반짝이는 사과를 집었다 내려놨다 하며 엄마는 고민한다. 노점을 지날 때마다 까만 비닐봉지가 하나둘씩 엄마손에 들린다. 짐이 많아질수록 내 손을 잡아줄 엄마손은 없어진다. 한쪽으로 몰아 들고 내 손을 잡아 달라 떼를 쓴다. 엄마 눈이 세모나게 변한다. 입을 얼른 집어넣고 칭얼거림을 멈춘다. 무안해진 나는 엄마 치마에 슬쩍 기대 본다. 차르르 감촉이 좋다. 얼굴을 문지른다. 쪼그려 앉아 엄마 치마를 들추고 만진다. 엄마는 내려가는 허리 고무줄을 붙잡으시며 씁~ 하신다. 얼른 일어서서 의젓하게 서있는 척을 한다.

고소한 두부가게를 지날 때 낑낑 거리는 소리가 난다. 강아지다. 새끼 강아지 네 마리가 빨간 대야에 담겨 할머니 앞에 꼬물거리고 있다. 키우지 못할 걸 알면서도 하얀 백구에게 눈이 간다. 머리를 쓰다듬어 볼까 손을 뻗히는 순간. "뻥이요~" 소리와 함께 펑! 터지는 소리가 난다. 강아지들은 할머니 품을 파고들고 나는 울음을 터트린다. 엄마가 팔꿈치 사이로 나를 당겨 안아 주신다. 웃는 엄마를 보니 안심이 된다.  


아저씨께 쌀을 한 되 맡긴다. 기다리는 동안 뻥튀기 아저씨에게 허세를 떤다.  

"우리 아빠는 이거보다 더 큰 대포 있어요~" 아저씨가 허허허 웃으신다.  

포병인 아빠를 따라 수십대는 보았던 탱크다. 훈련 시기엔 학교까지 포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울었던 건 까맣게 잊고 입이 나불댄다. 몇 번의 펑! 소리가 나고 우리 차례가 온다. 잘 튀겨진 쌀을 내게 건네주신다. 죽부인 만한 뻥튀기 비닐을 안고 시장을 걷는다.  


마지막 코스는 잔치 국숫집이다. 시장 한편에 기다란 테이블이 있다. 그 끝에 큰 들통이 있다. 육수가 팔팔 끓는다. 국수 주문을 하면 아주머니께서 국물을 그릇에 부어 주신다. 그릇에서 폴폴 연기가 난다. 소쿠리에서 돌돌 말려진 면을 그릇에 담고 김 가루 한 수저, 파 한 수저. 깨 한 수저 넣으면 완성이다. 국수 말아 주시는 아주머니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잘 짜인 춤을 보는 것 같다. 엄마가 떡볶이 한 접시도 시켜 주신다. 매운 떡볶이 한입 먹고 국수를 호로록 먹는다. 더운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고 헤헤거린다. 매운맛을 즐기기엔 아직 어리다. 물 한 컵을 내 앞에 놔주시며 엄마가 웃으신다. 엄마와 함께 신나게 먹는다. 동생 없이 오롯이 엄마를 차지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다.  


돌아오는 길은 기억이 없다. 늘 타자마자 잠들었던 것 같다. 해가 지는 저녁. 익숙한 아빠 냄새가 난다. 군복 냄새다. 흙냄새 같기도 풀 향기 같기도 하다. 잠에서 깼지만 눈을 감고 계속 업혀 있다. 아빠는 나를 업고 계단을 오른다. 곧 우리는 집에 도착한다.  


울산 슬도


30년이 흘렀다. 깊은 산속 마을에 살던 아이는 바닷가 마을 아줌마가 되었다. 군용품점이 즐비하던 거리는 건어물 거리가 되었다. 시장 거리엔 군복이 사라지고 중공업 작업복 천지다. 산골 나물이 있던 노상엔 해초와 돌미역이 널려 있다. 엄마 손잡으려 때를 쓰던 내 손에 보드라운 아이 손이 잡힌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시장 골목을 딸과 함께 걷는다.  


소금 끼가 하얗게 덮여 있는 연두색 해초 더미가 싱그럽다. 철망마다 이름 모를 생선들이 말려지고 있다.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사투리 사이를 걷는다. 무거운 장바구니 사이로 둘째의 손이 쓰윽 들어온다.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예전 엄마가 그랬든 씁~ 세모눈을 지어본다. 둘째는 모르는 척 해맑게 웃는다. 매일 보는 웃음 인 데도 마음이 무장해제된다. 아이 얼굴 따라 내 입꼬리도 올라간다. 경상도에만 있다는 물떡을 한 개 쥐어 준다. 딸은 어묵 국물에 짭조름 해진 가래떡 꼬치를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는다.  




산골 시장에도 바닷가 시장에도 활력이 넘친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에게도 생기가 돈다.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좋은 기운이 내 안에 스며든다. 그 안을 거닐며 나는 컸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커간다.

내 기억 속 엄마가 있는 것처럼 아이들의 추억 안에 내가 있다.  시장은 어떤 기억일까?  

바닷가 마을 작은 재래시장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덤으로 아이를 보고 행복하게 웃었던  얼굴도 기억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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