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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y 25. 2022

하굣길의 작은 다리

강원도 철원

학교를 나서면 길었던 하굣길이 시작된다. 무리는 크게 3개로 나뉘었다. 큰 다리로 가는 아이들, 작은 다리를 건너 군인아파트로 향하는 아이들. 그리고 논을 지나 집으로 걷는 친구들.  아이들은 군장 매듯 책가방을 매고 학교를 나섰다.


나는 그중 작은 다리 건너에 살았다. 3동뿐인 군인아파트와 관사는 다른 구역에 비해 친구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ㅇㅇ아! 학교 가자!" 소리 질러 주던 친구와 하교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건넜던 작은 다리는 너무 낮아 난간도 필요 없었다. 심지어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물길에 폭 잠겨버렸다. 높이만큼이나 폭도 좁았다. 차 한 대 지나가면 꽉 차던 다리에는 중간중간 반원 모양 공간이 있었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서둘러 반원 안으로 몸을 피했다.

© andreicastanha, 출처 Unsplash

하굣길의 작은 다리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책가방을 던져두고 허리 남짓한 강물로 점프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악어처럼 먹잇감을 기다렸다. 원피스 입은 여자아이가 지나가손바닥 가득 물을  물벼락을 맞게 했다. 치마가 젖어 속상한 아이가 눈을 흘기면 꼬르륵 잠수를  숨었다. 고학년 오빠들은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 언니들에게 던지곤 했다. 까맣고 미끌거리는 거머리를 보면 언니들은 기겁했다. 화가  언니들은 오빠들이 벗어놓은 운동화를 집어 강물에 던졌다. 화나야  오빠들은 둥둥 떠내려가는 신발을 잡으며 재밌어했고, 언니들은 그새 화가 풀렸는지 까르르 웃었다.


여름이면 강에 뛰어드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수영복은 생각도 못했다. 물에 젖은 티셔츠는 몸에 붙어 갈비뼈가 훤히 보였다.

수영하다 지친 아이들은 강가에서 올챙이 알을 두 손 가득 퍼올렸다. 구슬 같은 알은 투명하고 미끈했다. 알속에 비친 검은 줄기가 뱀의 눈처럼 보였다. 남자애들은 잔뜩 모은 알을 발로 밟았다. 돌로 내리치기도 했다. 부서진 알을 보며 아이들은 해맑게 웃었다. 나는 문득 섬뜩해졌다. 구경하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둘러 그곳을 피했다. 더 놀다 가자고 소리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친구들의 짧은 머리가 땀에 비춰 반짝였고, 개구리가 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올챙이를 애도하는 내 눈에도 번쩍이듯 눈물이 일었다.



© SichiRi, 출처 Pixabay

나는 해 질 무렵의 작은 다리를 좋아했다. 평소에 동생에게 미루던 심부름도 그 시간은 자처했다. 다리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석양에 강이 물들었다. 반짝이는 물길과 다리 높이가 같아 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물에 비친 지는 해는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깜빡였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던 강에 서있으면 시간 개념도 없어졌다. 나만 보기엔 너무 호사스러운 풍경이었다. 강은 이곳저곳에서 반짝이다 노을과 함께 까만 밤으로 변했다.

두부 사러 보낸 딸은 찌개가 졸아들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도 알길 없는 심부름 길의 끝은 야단으로 끝났지만. 혼나도 혼나도 억울할 일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강 따라 핀 아카시아 나무가 바람 따라 향긋했다.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는 낚싯대 같았다. 물에 닿을 듯 가지를 내리다 바람 한 점에 물기를 털어내며 살랑거렸다. 쌩하고 지나가기 아까운 풍경에 자전거를 겨드랑이에 끼고 조용히 걸었다. 작은 다리에 있으면 국군방송도 감미로웠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나이였지만 이 찰나의 시간이 아름답게 가슴에 사무쳤다.




진해에서 강원도로 전학 온 전학생의 얼굴은 유난히 희었다. 1년여간의 입원과 재활로 실내에만 있었던 몸은 투명한 물고기 같았다. 푸른 피가 비치던 내 다리는 1년이 지나며 조금씩 혈기를 되찾았고, 노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였던 친구들 얼굴처럼 보기 좋게 그을러 져 갔다.


지금의 마음은 그때와 달라 같은 풍경을 다시 마주한다 해도 가슴이 시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떠올려본다. 아카시아 향기가 나던 해 질 무렵의 작은 다리. 잔인하게 아름답던 나의 하굣길. 그곳에서의 나. 응답하라. 나의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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