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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y 24. 2022

13번의 계절 (2)

강원도 철원



물잠자리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덮던 철원의 가을. 부대와 논이 전부였던 시골마을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황금빛이었다. 여름 내 놀던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모두 바깥으로 나왔다. 긴 겨울이 오기 전 가을. 나는 이 계절을 사랑했다. 

© kel_foto, 출처 Unsplash

 눈에 닿는 곳 모두가 산인 강원도에는 밤나무가 많았다. 긴 장대를 들고 나무를 흔들어 밤을 얻곤 했다. 밤송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신발로 요령 좋게 껍질을 깠다. 바늘 안의 밤은 토실토실한 갈색이었다. 엄마는 솥 한가득 밤을 삶았다. 칼로 반 쪼개 주면 동생과 나는 티스푼을 들고 달려들었다. 가끔 벌레를 먹기도 했다. 포슬포슬한 밤 사이에 숨어있던 벌레는 쌉쌀했다. 내가 퉤퉤 뱉으며 괴로워하면 동생은 세상 즐겁게 깔깔거렸다. 밤을 파먹으며 동생도 벌레를 먹기를 기다렸지만 어쩐지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심술 맞게 굴던 가을. 밤처럼 불룩해진 배를 대고 엎드리는 사이 청명한 가을밤은 소리 없이 지나갔다.

  


© johnprice, 출처 Unsplash

눈부셨던 가을은 빠르게 지나갔다. 11월 중순인 내 생일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되었다. 12월이 오기도 전 첫눈이 내리곤 했다. 철원의 겨울은 길었다. 긴 겨울의 등교 준비는 더더욱 바빴다. 내복을 입고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썼다. 엄마는 현관 앞에선 내 얼굴을 목도리로 칭칭 감쌌다. 목도리로 감겨 미라가 된 나는 비장한 눈빛으로 엄마와 인사를 나누며 집을 나섰다. 아파트 입구에는 두 사람 겨우 걸을 눈벽이 쌓여있다. 허리 넘어까지 오는 눈들을 사병 아저씨들이 삽질로 치우고 있었다. 전방의 군생활은 혹독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고생을 알리 없었다. 장갑 낀 손으로 눈벽에 구멍을 뚫으며 그저 신나 했다.

 

숨을 몰아쉬면 목도리가 뜨거워졌다 차게 식었다. 숨이 막혀 잠깐 얼굴을 드러냈다 칼바람을 맞는다. 방금까지 따듯했던 내 숨이 금세 얼음으로 바뀐다. 영하 40도. 이곳은 남한의 꼭대기 철원이다.  

포근한 눈은 하루 뒤 얼음으로 변한다. 등교하는 아이들은 꼭 펭귄 떼 같다. 뒤뚱뒤뚱 걷다 차례로 미끄러진다. "휴우. 저렇게 넘어질 뻔했네.' 하는 순간 꽈당. 내 차례다. 옷으로 동그래진 몸은 일으키기도 쉽지 않다.  

 

겨울방학쯤엔 부대에서 논을 막아 스케이트장을 만들었다. 작은 군용 천막이 처지고 꽤 큰 실외 스케이트장이 개장했다. 남동생은 눈뜨자마자 스케이트장으로 출근을 했다. 아빠한테 졸라 만든 하키 채를 들고 나서면 벌써 아이들이 가득이었다. 운동신경이 없던 나에게도 스케이트화가 있었다. 겨울 아침이면 운동하라고 등 떠밀려 나가곤 했다. 다른 아이들은 배우지 않아도 씽씽 타던데 내겐 어렵기만 했다. 한걸음마다 넘어지는 나를 보던 동생은 깔깔대며 다가왔다. 하키 채라 불리는 나무 막대기를 잡고 몇 걸음을 뗐다. 한 바퀴 돌려주던 동생은 금세 친구에게 신경을 뺏겼다. 하키 채가 손에서 사라지면 나는 곧바로 넘어졌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운동신경이다. 얼음에 반사된 햇빛 덕분일까. 동생 얼굴은  여름보다 겨울이 더 까맸다. 

 


 

© nanichkar, 출처 Unsplash

학교 개학이 시작되고 한참 뒤늦은 봄이 찾아온다. 산꼭대기는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반짝이지만 창문 밖 땅은 아지랑이로 어지럽다. 흙냄새가 폴폴 나고 눈 대신 비가 내리고 나면 드디어 봄이다. 엄마들은 무리를 지어 봄나물을 따러 산으로 향한다. 두꺼웠던 군용 잠바를 벗은 아빠 출근길도 한결 가볍다. 스케이트장이었던 논은 다시 제주인을 찾아 푸릇한 모가 심어진다.  


국어 교과서는 늘 새로운 친구들과 인사하는 단원으로 시작했다. 한 학년 한 반인 작은 분교에서 난 늘 의문이었다. 4년째 같은 반인 친구들과 무슨 소개를 한단 말인가. 다른 지역 아이들은 학년이 지나면 이름을 바꾸기라도 하는 걸까. 세상의 전부가 나였던 시골소녀의 물음은 공허했다.

 

 


 

눈과 산이 가득했던 이곳에서 4년, 13번의 계절을 보냈다. 

사계절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나의 계절. 나는 이곳에서 최고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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