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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y 28. 2022

우리들 가슴에는 계급장이 없었다.

군인가족

30년 전 철원. 내가 살던 전방의 마을은 조금 특별한 곳이었다. 반의 90%가 군인가족이었던 위수지역의 초등학교. 아빠들의 일터는 일반 회사와는 달랐다. 상하관계가 뚜렷한 군인의 삶은 아빠를 이어 엄마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부대 안의 삶과 밖의 삶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우리 이웃은 모두 아빠의 상사나 동료, 부하직원이었다. 아빠의 지위는 곧 엄마의 지위였다. 나이 차이가 얼마든 아빠보다 높은 지위의 안사람은 사모님이 되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사모님 소리를 듣기도 했고, 사모님 대접을 하러 가기도 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은 학교 생활에도 적용되었다. 싸우고 화해하는 건 아이들 세계에서는 일상이었지만, 가끔 싸움 중재는 다른 방향으로 튀기도 했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 싸움에 개입했다. 때린 아이와 맞은 아이가 엄연히 있건만 화해는 어쩐지 엉뚱한 아이에게서 마무리되곤 했다. 어른들은 드러내지 않고 치사해졌다. 그래서 사과를 받아야 마땅한 아이의 일은 조용히 묻히기도 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른들 말마따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아빠의 지위를 사용했다. 힘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 속에서 나는 가끔 서글펐다.



모자에 무궁화가 여럿이던 아빠를 둔 친구는 부대 내 하나뿐인 관사에 살았다. 우리 집과 달리 친구집은 연병장이 훤히 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다. 총든 아저씨가 지키는 부대입구를 통과해야만 갈 수 있는 친구집은 좁은 군인아파트와 달리 널찍한 마당과 소파를 놓고도 여유로운 거실이 있었다. 

국군의 날에 태어난 장군의 딸인 친구는 사병 아저씨가 운전하는 지프차를 타고 학교로 왔다. 하교 후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님처럼 군용 마차를 타고 귀가했다. 

부러울 일이 전혀 없을 것 같던 친구는 지프차를 타기 전 조금은 슬픈 얼굴이 되었다. 우리 아빠들 중 제일 높은 계급에 제일 좋은 관사에 살았지만 친구는 종종 외로워했다. 학교 앞에 친구를 데리러 온 사병 아저씨에게 놀고 가고 싶다 졸라 댔지만 친구의 바람은 대부분 이뤄지지 않았다. 

친구는 이웃이 많은 군인아파트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해질 때까지 노는 일은 친구에게 없는 일상이었다.

우리 반 아빠들이 모두 차렷하고 경례하는 아빠를 두고도 나를 부러워하다니. 언뜻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친구 눈빛은 진심이었다. 

나는 지프차 뒤에 서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곤 했다. 내 인사는 아빠들의 경례와는 결이 달랐다.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위로며 진심이었다.


© silviarita, 출처 Pixabay


군인가족뿐이었던 우리 반에는 10%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  친구는 작은 교회  딸이었다. 친구는 군인아파트가 있던 작은 다리나  다리로 가지 않았다. 친구의 집은  건너였다. 동생과 함께 편도 1시간을 걸어 학교에 왔다. 자꾸 옆으로 새는 동생 2명을 데리고 다녀야 했던 친구는 1교시도 전에 지치곤 했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 앞에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어렸던 친구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비포장 도로를 따라 걸었다. 친구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있었다. 양치기처럼 막대기 하나든 친구는 먼지를 뿜으며 달려오는 트럭에게서 동생들을 지켰다. 큰소리도 필요 없었다. 나뭇가지로 동생들을 툭툭 치면 동생들은 고분고분해졌다. 친구 집에 놀러  때면 내손에도 나뭇가지를 쥐어줬다. 나는 차마 치지는 못하고 입으로 휘익 휘익하며 도로로 뛰어드는 동생들을 막았다.


군인아파트와 친구들이 숨 막힐 때면 나는 논 건너 친구네 집에 가곤 했다. 친구네 집에서는 “장교 딸이 말이야!”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됐다. 인사를 경례로 대신하는 아빠들 없는 친구 집. 나는 어쩐지 친구 집에서 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30년 전. 내가 살던 마을과 학교는 조금 특별한 곳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세상의 불평등함을 눈치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아이며 친구였다. 종종 어른들을 흉내내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어린 만큼 순수하기도 했다. 싸움은 싸움일 뿐. 우리들 가슴팍에는 계급장이 없었다.


그때 나의 친구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서글픈 표정을 짓던 나를 기억할까? 깊은 밤 그대들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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