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쇼핑 욕구가 끓어오르는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나의 소비욕구는 좀처럼 뜨거워지질 않는다. 일부러 옷 쇼핑 가는 것도 드물고, 신발은 구멍나 비가 양말로 들이칠때야 산다. 신형 휴대폰도 관심 밖이다. 새것보다 손에 익은 것이 좋아 예전 모델을 선호한다. 핸드폰을 바꾸는 이유조차 단순하다. 깨져서 액정이 보이지 않거나 배터리 성능이 떨어져 도저히 못쓸 때. 그 외 폰을 바꾸는 일은 내겐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일이다.
돈을 아껴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다. 예쁜 것을 동경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물건을 고르고 받는 행위가 귀찮다. 가뭄에 콩 나듯 어렵사리 사 온 물건에도 애착이나 욕심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만족할리 없으니 다음쇼핑 기회는 멀리멀리 날아간다.
이런 내게 구입 욕구를 끓어오르게 하는 일이 생겼다. 그 대상은 생필품도 먹거리도 아니다.
'향수' 내 장바구니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물품이다.
Aube. befgamot, lime, juniperberry
자정이 넘은 시간, 매일같이 계속된 야근에 지칠 대로 지쳐 씻지도 않고 침대에 쓰러지며 생각한다. 내일 눈 떴을 때 이곳이 아니었으면. 그곳은 비좁은 자취방이 아닌 프랑스 어느 시골에 있을 법 한 아담한 집이었으면. 자동차 소음이나 취객의 고함소리 대신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오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새벽을 여는 햇살이 축복하듯 나를 비추고 이슬 맺힌 풀과 꽃들이 반짝거리며 나를 반겨주었으면. 막 딴 신 베르가못 잎으로 티를 마시는 그런 아침을 맞았으면.
우연히 읽은 광고 문구다. 향기에 대한 설명을 읽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밑에 작게 첨부된 Dropper 30,000 won/Spray 30,000 won 글자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물건을 팔아먹으려 내게 온 사기꾼일지라도 끔뻑 속아주고 싶은 글귀다.
향기를 맡으면 나를 프랑스의 어떤 아담한 집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햇살에 축복받고 이슬이 나를 반겨주는 곳은 어딜까. 향기를 이렇게 표현해 낼 줄 아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향을 만든 조향사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숨죽이며 다른 향수를 둘러본다.
달콤한 과일을 먹은 뒤의 낮잠
봄비에 젖어 흐르는 꽃잎들
가을 달빛을 머금은 보라꽃
도망쳐 온 낙원의 풍경
아.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모두 소장하고 싶어 진다. 쇼윈도에 걸린 옷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어 지나치기가 어렵다.
'달콤한 과일을 먹은 뒤의 낮잠'이라. 달콤한 과일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설명은 낮잠을 보태며 내 머릿속을 간지럽힌다. 달콤하고 나른한 향일까. jasmine, Rose, peach, musk.. 문구 밑에는 조합된 향이 적혀 있다. 활자임에도 불구하고 글씨에서 단내가 나는 듯했다.
'도망쳐 온 낙원의 풍경' 은 어떠한가. 그 낙원은 낮인가 밤인가. 들꽃이 가득한 평야인가, 파도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해변일까. 도대체 어떤 향이 낙원의 풍경일까. 문장 하나에 물음표는 늘어만 간다.
Susie salmon
방금 사온 꽃다발의 포장을 뜯어내 반 정도 물이 담긴 투명한 꽃에 꽂는다. 꽃 한 다발에서 내어지는 생기가 테이블 주변으로 서서히 퍼져나간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한입 베어 물고 다시금 꽃다발에 코를 가까이 댄다. 옅게 깔린 꽃내음 위로 올라오는 상큼함을 나는 느리게 삼켜낸다.
Susie salmon. 나는 결국 장바구니에 향수를 담았다. 다른 쇼핑과 다르게 결정도 빨랐다. 결제를 하고 배송기사님을 기다렸다. 언제 오시려나. 배송 조회를 새로고침 하면서 웃음이 났다. 안달 난 마음과는 다르게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기다림이 길었으면 싶기도 했다.
받은 향수는 병이 화려하지도 고가의 제품도 아니었지만 마음에 쏙 들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향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상상하게 만들었던 문구. 그걸로 상품의 가치는 이미 치러진 셈이다.
철옹성 같았던 내 소비생활은 상상력 가득한 글귀에 함락되었다. 결국 내 마음을 움직이는 건 글이었나 보다. 마음이 열리자 꾹 입닫던 지갑도 열린다.
다음 내 결정 버튼을 누를 상품은 무엇일까? 어떤 근사한 글로 나를 유혹할까? 맛깔난 광고를 기다려본다. 이번과 같다면 두 눈 꼭 감고 속아 넘어갈 테다. 지갑을 활짝 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