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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랑 May 23. 2022

[남미에세이] #6 가장 완벽한 순간에

페루_와라즈_Huaraz (2), <왜 지금 남미?>

Travel Route | 페루 - 칠레 - 볼리비아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페루 여행 | 리마 - 와라즈 Huaraz - 쿠스코



⌜가장 완벽한 순간에⌟


개인적으로 와라즈의 69호수는 내 남미 여행의 절정이었다. 걱정한 만큼, 고생한 만큼, 아름다운 경치만큼, 잊을 수 없는 완정의 순간 배워낸 감정들이 강렬히 남아있다. 죽기 전 또 남미로 여행을 떠난다면 반드시 다시 찾고 싶은 곳은 와라즈의 69호수다.






새벽 5시.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와라즈의 골목길에서 남동생과 나는 어제 밤 예약해둔 "69호수"의 트레킹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루에서 유명한 트레킹 코스는 대표적으로 쿠스코의 잉카 트레킹과 와라즈의 69호수 트레킹이 있다. 와라즈는 페루에서 가장 높은 설산인 우아스카란 국립공원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수백 개의 호수들이 유명한데, 69호수는 69번째 발견된 호수라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가이드가 웃으면서 힘들기로 악명이 높다며 경고를 줬지만, 여행 책자에서 봤던 사진이 아름다웠기도 했고 3-4시간 동안 짧고 굵게 뚫어내는 트레킹이 내 성질에 맞겠다 싶어 69호수를 택했다. 두 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한 후 오전 7시, 본격적인 69호수 트레킹이 시작됐다.


와라즈의 새벽. 트레킹 투어 버스 안.


해발 4600m에 위치한 호수이기 때문에 고산병은 무시 못할 변수였다. 나름대로의 대비책으로 동생과 나는 타이레놀 몇 알, 생수 한 병씩을 챙겼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고산병에 효과가 있다는 코카차도 마시고 출발했던 터였다. 그럼에도 호흡이 힘들어지면 바로 하산하라는 이야기를 가이드가 해줬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채로 버스에 올랐다. '할 수 있을까'하는 복잡한 생각들로 해결못할 불안감이 몰려올 때, 이를 떨쳐내는 나만의 방법은 이미 도착선에 도달한 나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여지 자체를 삭제시켜버림으로써 용기를 얻는 무식한 방식인데, 효과가 좋다. 당시에도 정상에 올라 완정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내 모습을 미리부터 상상해보는 것으로 용기를 얻었다. 용기를 얻어 실제로 도전해본 다음에는, 솔직히 말해 밑져야 본전이다. 그러니 손해는 없다. 성공하면 좋은 것! 실패해도 밑져야 본전! 이 방법은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라. 효과가 아주 좋다.



각설하고, 어찌되었는 트레킹은 시작됐다. 등정 초반, 걸어가는 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고 표현하고 싶다. 대한민국에서는 생전 볼 수 없는 놀라운 풍경에 말을 잃었다. 날씨가 좋아 파란 하늘 너머로 펼쳐진 만년설의 빙하가 선명하게 보였고, 그 앞에 펼쳐진 푸른색 초원과 그 위를 거니는 말과 소 떼, 이 공간을 감싸는 거대한 바위와 산등성이들,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빙하들이 녹아 만들어진 차가운 물줄기. 그 모든 자연의 조각들이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을 언제 또 만끽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난길"이 시작되었다. 끝도 없이 늘어선 가파른 돌바윗길 코스가 시작된 것이다. 다른 그림은 없다. 딱 이런 모양새 아닌가. 고난 말이다. 내게 고난의 정의는 이토록 힘겨운 "지리함"이다. 지리하게 반복되는 바윗길이 끝나지 않을 기세로 닥쳐와 "당장의 무엇"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 말이다. 눈에 보이는 무엇이 없으니 희망 끈을 붙잡기가 참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희망만이 내 상황을 짓누르는 이 고난을 이겨낼 유일한 출구라는 사실을, 당신도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이 두 배로 괴롭다.

내게 고난의 정의는 딱 이렇다.


트레킹 코스 돌바윗길


그리고 그날, 나는 이러한 고난의 끝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것도 가장 완벽한 순간에. 


와라즈 69호수

눈 앞에 펼쳐진 69호수는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는 시간조차 아까워 눈에 담아 두기에 바쁠 만큼 미친듯이 아름다웠다. 재밌는 사실은, 호수까지 2분도 안 되는 거리를 앞두고, 호수를 등진 채 나는 10분이나 넘는 아까운 시간을 들소와 보내버렸다는 사실이다. 바보같은 나 자신에게 한 소리 쏟아냈다. 변명을 하자면, 갑자기 바위틈에서 소 한 마리가 튀어나왔는데, 도저히 호수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소랑 셀피나 찍자는 생각으로 보내버린 10분이었다. 그렇게 다시 힘을 내서 걷자고, 갈 길을 가기 위해 우연히 뒤를 돌아봤던 순간, 에메랄드 빛의 69호수는 바위 틈 사이로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을 뽐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고산병으로 이미 산 중턱에서 포기를 선언해 하산했던 것으로 설명이 될까. 정말 힘겹게 이겨낸 등산 코스의 난이도와 함께 호수 바로 앞전에서 생각없이 보내버린 10분이라는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눈 앞에 펼쳐진 호수가 백배로 값지게 느껴졌다. 남들보다 백배는 더 벅찬 감격으로 69호수의 풍경을 만끽했다고 확신한다. 우리 인생으로도 너무나 완벽하게 적용되는 인사이트 아닌가. 각자의 꿈과, 비전과, 목표를 향해 달려대며 참으로 고된 과정들을 겪어내고 있지만, 결국 이런류의 복선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충분히 완비될 때가, 사실상 성취의 기쁨을 누릴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진리를 믿어보자.



물을 만져보니 정말 차가웠다. 설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라니. 호수 옆에는 낮잠 자는 사람, 수영하는 사람, 심지어 물을 마셔보는 사람까지. 정상에 오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각자의 형태로 자유롭게 만끽하는 장면들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짜릿한 성공의 순간은 이처럼 어느 순간 우리들의 눈 앞에 와 있을 건가보다.

예상치 못한 순간, 가장 완벽한 그 순간에 

우리들의 꿈이, 고대해온 꿈이 이루어지는 기쁨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기대하자.






2018/7/2/월요일의 기록


정상의 기쁨을 만끽하고 내려오는 자의 여유.

내가 정말 해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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