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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겁꾼 Mar 31. 2021

좁은 집이라도 괜찮아요

매일 밤 우리집 골방에서 열리는 은밀한 파티


아기를 낳으니 집은 더 이상 둘이 살던 신혼집이 아니다. 생활이 육아 모드에 맞춰지면서 나타나는 당연하고도 가장 큰 변화다. 거실에 있던 쇼파가 사라졌고, 티비마저 없앴다. 그 자리는 놀이매트, 아이의 옷가지와 기저귀를 넣는 수납장, 그리고 장난감 등으로 대체됐다.


애 낳기 전 후가 극명하다


사실 거실이 아니라 아이의 방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이쯤 되니 아이가 사는 집에 우리 부부가 얹혀사는 느낌도 난다.


집을 점령하신 주인님


우리 집은 침실과 옷방, 단 두 개의 방이 있다. 둘이 살 때는 적당한 크기라고 생각했던 집인데, 아이가 태어나니 좁디좁다. 아기는 참 작은데, 이 작은 사람에게 필요한 아이템들은 뭐가 이리 많고, 크기도 거대한지 모르겠다. (‘쏘서’와 ‘점퍼루’ 장난감을 사용하던 시절 우리 집은 발 디딜 틈 없는 포화상태였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불필요한 물건들을 과감하게 버려가며 아이에게 필요한 공간을 간신히 만든다.


미디어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기가 깨어있는 시간에는 티비를 켜지 않고 있고, 그러다 보니 티비가 있으나 마나라고 생각해서 내친김이 팔았는데, 우리의 유일한 엔터테인먼트를 담당해주던 친구가 사라지니 어쩐지 허전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플레이룸 같은걸 만들어볼까?”라고 스쳐 지나가듯 했던 남편의 말 한마디에 탄력을 받아 좁은 옷방을 일종의 플레이룸으로 활용해보기로 하고, 우리는 그곳을 ‘골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골방


안 입는 옷들을 한가득 버리고, 방 한켠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 책상도 중고로 팔며 대대적인 공간 정리에 들어갔다. 그렇게 겨우 쥐어 짜내다시피 만들어낸 공간에 시댁에서 받아온 작은 티비를 하나 놨다. 좁아서 답답하지 않을까 싶던 예상과는 다르게 꽤 아늑하다.




아이가 잠들면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골방으로 모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만의 조용하고 은밀한 파티를 시작한다. 배달 음식으로 늦은 저녁을 먹기도 하고, 간단한 안주를 벗 삼아 맥주를 한 잔 하기도 한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도 보고, 닌텐도를 연결해 게임을 하기도 한다.


오예!!!


매일 밤 약 2~3시간 남짓한 골방에서의 시간들은 육퇴 후 가장 느슨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깰까 조마조마한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깊은 잠에 들기까지 자다가 몇 번씩 깨어나는 편인데, 밥을 먹다가도 영화를 보다가도 아기가 깨서 울면 곧장 달려가 아이를 토닥이고 다시 돌아온다.


아이가 유난히 자주 깨는 날이면 일시정지를 하도 눌러서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데 세 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가끔 운 좋게도 아이가 영화 러닝타임 동안 한 번도 깨지 않는 날도 있긴 있으나, 그건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일이다.




육아에 지쳐 잠드는 날들이 쌓이다 보면 내 삶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분명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며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데, 왠지 남는 게 없는 것만 같고, 마치 비생산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도 든다.


내 관심사는 물론이고 남편과 나누는 대화도 대부분 아이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우리를 잃고 싶지 않다.’, ‘육아가 아닌 것들로도 내 삶을 채우고 싶다.’는 갈증이 항상 있었다.


우리 집 골방 플레이룸은 널찍하지도 않고, 쾌적한 홈시어터도 아니다. 영화든 드라마든 흐름을 뚝뚝 끊으며 봐야 하는 날이 대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루 끝에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일상이 조금은 윤택해지는 느낌이 든다. 영화의 여운을 곱씹다 잠들면 왠지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다.


오늘 밤에는 무슨 영화를 볼까? 하는 설렘은 하루를 시작하는 좋은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다음날 아침 남편과 서로의 영화 평점을 공유하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작아도, 좁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 매일 밤 얻어가는 에너지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골방 플레이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65일 연중무휴다.


“가족을 위한 당신의 단조로운 일상은, 모두에겐 소중한 선물이에요.”
- 영화 ‘툴리(Tu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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