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 간의 길었던 치료가 드디어 끝났다
지난해 10월 나는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그로부터 약 10개월 간 약물 치료를 받아왔고, 이제 처방받은 마지막 약 한 봉지만 먹으면 기나긴 그 여정은 끝이 난다.
나의 병을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널리 퍼트리지도 않았다. ‘나는 우울증에 걸렸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동정인지 걱정인지 모를 이상한 시선을 느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의 가까운 몇몇에게만 투병(?)을 알려 왔던 터라, 어쩌면 이 글은 나를 아는 사람들을 조금은 놀라게 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소 PMS(생리 전 증후군)가 있는 편이었는데, 감정 조절이 힘들어지면 대부분 생리 전일 경우가 많았다. 호르몬 주기에 맞춰 나타나는 우울감은 자고 일어나거나 생리가 끝나는 등 일정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져 기분은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몇 날 며칠 ‘우울하다’는 감정의 단어가 머릿속에 가득 차서 온몸을 빙빙 맴돌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울었고, 왠지 모르게 매일 억울하고 슬펐다. 주체할 수 없이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이 우울감은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정신과에 문을 두드리기까지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환자가 되어버린다는 게 왠지 자신이 없었다.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보자고 마음을 굳게 먹고 전화로 진료 예약하려고 했더니, 이번 주는 예약이 다 차서 다음 주가 돼서야 예약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도대체 얼마나 환자가 많길래, 내 맘대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병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기분이 얼얼했다. 특별한 사람들만 가는 병원이라고 생각했던, 너무나도 편협했던 나 자신이 어쩐지 민망해졌다.
진료일 아침, 병원에 도착해 검사지를 받고 다여섯장 되는 분량의 검사지에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하나둘씩 체크했다. 검사지를 작성하면 작성할수록 이래서 내가 병원에 오게 된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꽤 길었던 검사가 끝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그 안은 조용하고 고요했고, 의사 선생님마저도 차분하셨다. 여기서 나는 이제 무슨 얘기를 시작해야 하는 걸까? 심장이 두근두근 했다.
병원에 오기 전, 내가 가장 우려하고 걱정했던 건 약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약을 먹고 싶지 않았다. 약으로 정신을 좌우한다는 건, 나의 자유의지를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정신과 약은 감기약처럼 며칠 먹고 그만 먹는 것이 아닌, 장기 복용이 필요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것 역시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가 약을 먹어야 하나요?’라는 나의 첫 질문에 선생님은 0.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앞이 까마득했다.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내 상태가 좋지 않아서라는 의미이기도 했기에, 나는 아프다는 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절망적이었다.
약은 감정의 악순환을 선순환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며, 안전한 치료 방법임을 거듭 설명해주셨다. 깁스를 하는 것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만약 뼈가 부러져서 가만히 놔두면 시간이 흘러 붙기야 하겠지만, 잘 붙지 않을 수 있고 문제가 다시 생길 수 있는 것처럼 우울감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날 수도 있는 거라고 하셨다. 그러니 쉬운 방법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사실 나는 절대 울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병원에 갔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라는 질문에 이유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순간 뭐 때문에 눈물이 흘렀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진료실에 휴지가 있나 보다 생각하며 일단 눈앞에 보이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 마음속에 무겁게 안고 있었던 감정들을 하나둘씩 쏟아냈다.
내 상태는,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강박과, 우울의 정도가 심한 수준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약만 잘 챙겨 먹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선생님의 처방이었다.
게다가 나의 우울감은 아이에게도 전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그게 제일 무서웠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아이에게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나를 병원으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신기하게도 병원에 다녀온 날부터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살쪘으니까 조금만 먹어야지’,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운동해야지’하고 나를 채찍질하던 걸 전부 내려놓고, 내 몸과 마음이 가장 편안할 수 있도록 잘 먹고 잘 자는 삶에 집중하니 그걸로 기분이 제법 나아진 것이다. 진작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나는 나에게 왜 이리 엄격하고도 불친절했을까.
나는 우울증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나 자신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과정과 상태에 집중하며 살기로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굳이 애써서 무리하지 않고, 쓸데없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