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가 되면 자의든 타의든 면접을 보는 기회가 생긴다. 연차가 적을 땐 나보다 회사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져 주체적인 모습을 갖기 어려웠다. 일이 어느 정도 적응되고 출근길에 웃을 수 있게 될 때 회사란 곳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란 걸 알게 된다. 이때가 되면 내가 있는 곳이 워라밸이 좋든, 팀이 좋든 말든 다른 회사에 있는 나의 모습을 슬쩍 생각해보게 된다. 메타인지의 시작. 신입 때 품었던 광고업의 목표를 되새김질해보고 다음 스텝에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지 고민한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는 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최대한 명료하게 결정하는 게 멘탈 관리에도 좋을 듯싶다. 사실 본인이 지향하는 커리어를 갖출 수 있는 곳에서 면접을 보는 게 제일 명쾌하다. 본인의 지향점을 담은 자기소개서와 어떻게 인사이트를 발견하고 카피로 풀어내는지를 담은 포트폴리오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케미를 확인하는 과정이니까. 특히 이직 면접일 경우에는 면접을 보는 사람에게도 일말의 주체성이 부여된다. 같이 일할 사람을 보는 자리고 어떤 일을 하는지 확인하러 간 거지 않나. 이렇게 면접을 갔다 오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들이 넘쳐 난다. 내 포트폴리오에서 질문을 끌어낸 인사이트나 아이디어부터 ‘컨셉워딩’ 같이 평상시에 자주 쓰지 않았던 업계 용어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어야 한다는 자기반성까지. 아니, 사실 면접을 보지 못한 곳이라도 얻는 게 있다. 서류 탈락의 이유가 뭔지 유추할 수 있으니까. 만약 영어 능력자를 뽑는 곳이 날 서류 탈락시켰으면, 다른 이유는 더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영어 성적을 올려야겠다는 근거리 목표가 생길 수 있지 않나. 어찌 되었든 회사로부터 주체성을 갖게 되었단 판단이 들었다면, 마음껏 커리어든 워라밸이든 본인의 지향점에 가까운 곳에 지원을 해보자.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니까.
어제와 닮은 오늘이 반복되는 주간이었다. 평범한 하루를 보낸 뒤 퇴근을 하고 있는데 ‘팅’하고 알람이 울리더라. 외국계 광고대행사에 관심 있으면 연락 달라는 헤드헌터의 메시지였다. 정확히 어느 회사일지 궁금했고 수락을 눌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전화가 왔다. 또 얼마 있지 않아 오후 반차를 내고 면접 보러가고 있었다. 일전에 본 면접처럼 포트폴리오에 대한 이야기와 좋아하는 광고가 뭔지 등 일하는 태도와 카피 성향이 뭔지 물어보는 정도일 줄 알았다. 근데 웬걸 질문이 이렇게 어려울 수가... 초반엔 하하호호 분위기였지만, 중후반에 프로젝트 진행하는 것에 대해 깊게 들어왔고 오래전 진행했던 건이라 설상가상 기억의 혼선이 생기기까지 했다. 제일 어려웠던 건 이거다. 제시한 컨셉워딩 중 가장 좋았던 것과 하나의 컨셉에 다른 결의 카피를 썼던 구체적 사례. 잠깐 컨셉..워딩? 사실 업계에서 쓰는 워딩들은 누가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결이 좀 다르다. 크리에이티브 테마를 말하는 건가? 키카피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컨셉을 말하는 건가? 혼란스러웠고 명쾌한 답변을 못했다. 나보다 몇 배의 연차를 가지신 분 앞에서 아는 척을 할 순 없었다. 지금 있는 회사가 인하우스라 PT보단 고정 물량에 대한 아이데이션이 잦았다. 이때는 따로 컨셉워딩을 뽑아내지 않고 여러 접근법으로 펼쳐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편이다. PT를 주로 하는 그 팀의 일하는 방식과 너무나 달라서 당최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 하나의 컨셉에 다른 결을 카피를 썼던 사례가 있냐는 질문엔 당연히 있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러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포트폴리오 첫 장부터 머릿속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질문의 답을 찾으려 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냥 속 시원하게, “기억이 안 납니다. 하핫”를 시전해버렸다. 카피라이터로서 아직 경험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고 스터디가 필요하단 게 확실해졌다. 면접 다음 날 카피 선배에게 컨셉 워딩을 어떤 맥락에서 쓰는지 물어본 결과 우리팀에서 뽑아내던 ‘크리에이티브 테마’의 결이란 걸 알게 됐다. 또 PT 할 때 이 테마를 뽑아내는데 꽤 오랜 시간 투자를 한다는 걸 듣게 됐고 기획서를 분석해보는 스터디가 필요하단 걸 뼈저리게 체감했다. 아직 면접 결과가 어떻게 될진 모른다. 그렇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뭔지 명확히 알게 된 걸로 합/불합에 상관없이 충분히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