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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Dec 31. 2023

희망퇴직에도 희망이 있나요?

 2023년의 감정을 톺아보면, 9년 전 수능 이후 수시 결과만 남겨둔 고등학교 3학년 때와 닮았다. 특히 2023년 하반기는 더 가관이다. 지원한 수시 원서 6곳 중 이미 5곳은 불합격, 나머지 한 곳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 연상된다. 이 먹먹한 심정은 단지 상상에 기반한 감정이 아니다. 실제 겪었던 경험이라 아직도 그 설움을 잊지 못한다. 처음 맞아보는 낯선 온도를 잊으려 침대 위 전기매트를 달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밤은 보낼 수 없다. 괜스레 새벽 2시까지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보며 늦장 부리게 된다. 흥미를 잃은 마음에 억지로라도 텐션을 잔뜩 높인다. 불을 끄고 눈을 지그시 닫음과 동시에 불안함이 투영된 잡념의 문이 열린다. 눈이 덮여도 가파름은 여전한 설악산에서, 몸집을 키우며 굴러가고 있는 스노우볼처럼 잡생각이 똘똘 뭉친다. 난 그렇게 눈을 감고 생각을 비운다는 행위인 명상을 믿지 않게 되었다. 오래된 침묵으로 메마른 혓바닥과 달리 눈은 촉촉하다. 새벽 감성이 올라와서 그런지, 영상을 미치도록 봐서 그런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베개 커버에 쉼표가 또르르 내려와 찍힌다. 마지막 수시 합격 소식을 듣기 전 날까지 하루의 마무리를 한숨으로 내뱉는 날은 계속되었다.


 2023년 새롭게 발아한 꽃의 생기로움을 즐기기도 전, 뉴스가 눈치 없이 구인구직 포기하고 그냥 쉬고 있는 MZ세대를 집중 조명했다. 잎의 생명력이 기력을 다했을 땐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는 헤드라인이 눈앞을 설쳤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체감하고 있었다. 광고 물량이 예전에 비해 줄어서 강제 워라밸이 보장되었던 것과 온에어 되는 광고들이 대게 세일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 슬프게도 경기가 좋지 않다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게 광고 예산, 마케팅 비용 그리고 사람 아닐까. 적은 예산으로 확실한 매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크리에이티브한 광고보다는 세일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만한 광고 같은 광고를 하게 될 것이다. 클라이언트도 그러한 선택이 모험보다는 보험일 테니까. 나빠지는 경기가 크리에이티브에 영향을 준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잔상을 남기는 광고를 아카이빙하고 있다. 2023년에도 변함없이 광고를 모았지만 선뜻 ‘광고아카이브’ 폴더에 간택되는 게 적어졌다. 여기도 세일즈 저기도 스킵하고 싶은 광고. 그러는 와중에 광고회사 지인들 사이에서 희망퇴직 이야기가 전염병이 퍼지듯 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 회사도 그러겠어?” 고정 물량이 있는 인하우스라 내심 안심했다. 하지만 회사란 곳은 언제 상장폐지될지 모르는 주식에 불과했다. 다른 광고회사에 인수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제한적 고용승계가 이뤄진다고 했다. 어릴 때 뉴스에서 자주 본 노조 시위는 꿈도 못 꾼 채 대부분 순응하는 분위기였다. 위로금을 받고 퇴직하거나 위로금을 포기하고 잔류하거나. 다만 잔류란 선택지에는 불명확한 회사의 미래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이란 시간이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아직도 계약서에 도장을 안 찍었단다. 의기투합하자는 의미로 열린 송년회 단체회식 자리에선 연거푸 무채색 희망의 말을 들어야 했다. ‘연말에 도장 찍으면 사무실 이전하고 업무 정상화될 거야, 조금만 더 버티자’ 며칠 뒤, 밤 10시쯤 문자가 무심하게 왔다. ‘내일 오전 10시 회의실에서 부사장 전달사항이 있으니 필히 참석 바랍니다.’ 기분이 묘했다. 다른 직원들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고 그렇게 오전 10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인간의 직감은 놀랍다. 인수가 결렬되었고 회사는 결국 청산하기로 됐다. 건너편의 대리님과 옆에 앉아있는 동기의 표정이 생생하다. 발을 동동거리듯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 요동쳤다. 다시금 느끼는 대학 불합격의 트라우마. 여긴 합격할 수밖에 없다고 장담한 곳에서의 불합격 통보급이었다. 3-4개월간 스스로 희망고문하며 버틴 게 아스라이 무너졌다. 믿기지가 않는다는 말만 진실임을 믿을 수 있었다. 결국 잔류한 사람들에겐 두 가지 선택만 남아있었다. 모기업으로 갈 것인가, 위로금을 받을 것인가. 고민할 수 있는 기한은 3일뿐. 어안이 벙벙할 시간도 부족했다. 설상가상 난 일본으로 휴가를 간 상황.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건너며 잔류할지 퇴사할지 고민했다. 좌우로 오가는 사람들처럼 내 선택도 왔다 갔다 변했다. 카피라이터를 계속할 것인가, 새로운 직무에 도전할 것인가.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여기 도쿄에서 해야 한다니. 이런 일이 나에게도 벌어지는구나 그저 이 생각뿐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이미 어찌할지 결정은 끝났다. 인생에 있어 중대한 결정을 하기까지의 복잡 미묘한 과정과 감정을 머지않아 글로 정리해 봐야겠다. 재난영화 시나리오에 버금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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