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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여름잠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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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Jan 27. 2022

스키장은 두 글자다

 스키장은 떨림이다.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스키장을 갔다. 사실 스키가 뭔지도 모르고 탔다. 내게 남아있는 건 첫눈을 맞이했을 때 느꼈을 떨림과 유사한 감정. 떨림은 곧 두려움으로 변모했다. 스키는 엉덩이로 배우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스키장은 스릴이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자 보드를 배웠다. 나름 새로운 도전. 스키를 탈 땐 보드를 타고 날카롭게 내려가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안정감이 있는 스키와 다를 그 스릴감. 스키는 옆으로만 넘어지지만, 보드는 앞, 뒤, 옆으로 넘어질 수 있으니까. 얼마나 스릴 넘치는가. 그렇게 스릴이 자기희생임을 몸소 느낀다.


 스키장은 여행이다.

 운전대를 잡을 나이가 되었다. 함께 보드를 배웠던 친구들과 일 년에 한 번은 스키장을 갔었다. 이제 스키장은 스포츠의 장이 아니라 뒤풀이장이 되었다. 운동했으니 술 마셔야 하지 않나. 내 인생 첫 술을 스키장에서 배웠다. 잘못 배웠다.


 스키장은 우정이다.

 정기적으로 떠났던 스키장 여행. 갈수록 인원은 줄어든다. 8명, 6명, 4명. 마지막까지 남은 4명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고 있는 친구들. 어느샌가 우린 우정을 위해 스키장에 간 게 아닐까.


 스키장은 습관이다.

 시베리아 기단이 슬며시 움직일 때,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는 시간이 길어질 때가 되면 누군가 말한다. "스키장 함 가야지?" 누군가 적기의 날짜를 추리고, 회원권이 있는 친구를 구해 숙소를 구하고, 접선 장소를 모색한다. 겨울이 왔고, 스키장을 간다.


 스키장은 추억이다.

 습관이 추억이 된다는 건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일평생 축구를 해온 축구선수가 축구를 하지 않는 이유가 부상일 가능성이 크듯. 연례행사였던 스키장 여행은 추억이 되었다. 풋살 하다 혼자 넘어져 다친 발목 때문에... 예전 같으면, 하루 이틀이면 나았을 텐데. 나약함에 가까워질수록 스키장은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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