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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여름잠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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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Apr 20. 2022

여름잠

 사계절 단어 중 여름을 가장 애정한다. 여름. 외국인 친구가 생긴다면 처음으로 소개해주고 싶은 단어. 여름의 ‘ㅇ’은 다른 자음, 모음 아래 쭈그리고 있지 않는다. 주눅 들지 않는다. 당당히 맨 앞자리에 서있다. 솟아오르는 땀,  그 땀을 증발시키는 햇빛, 아지랑이와 겹쳐 눈에 아른아른하는 푸른 식물들, 간간이 찾아와서 더 반가운 바람. 이 모든 걸 품은 ‘여름’이란 단어를 ‘ㅇ’은 이끌고 있다. 첫인상이 중요한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나 보다. 단단한 내공만큼 외적으로도 큰 ‘ㅇ’은 모진 곳 없이, 틱틱거리지 않는 순진한 인상을 준다. ‘ㅕ’는 ‘ㅇ’이랑 만나 훨씬 매력적이게 보인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지 않는 ‘ㅕ’지 않나. 어색할만한데 특히 여름의 ‘ㅕ’는 익숙하다. 이게 낯설렘이란 감정일 것이다. 순둥순둥한 ‘ㅇ’과 낯가리는 ‘ㅕ’가 어울리니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이루고 있다.


 중학교 국어시간 때 김영랑 시인의 시를 배운 적이 있다. 여담으로 그분의 본명이 김윤식이지만 ‘ㅇ’과 ‘ㄹ’과 같은 유성음이 포함되게 개명했고 그의 시에서도 유성음의 활용이 활발하다란 것이 기억 한편에 남아있다. 김영랑 시인도 모든 자음이 유성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늠름한 ‘름’이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는 ‘여’를 밀어주고 있으니 ‘여름’은 더더욱 매력적이게 보인다. 굳게 닫힌 ‘ㅁ’ 받침이 여름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정리해주기도 하니 군더더기 없는 발음의 마무리까지도 좋다. 글자로서의 여름은 내가 애정하는 계절이다.


 계절로서의 여름은 어떤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덥고 땀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내가 흘리는 땀은 반갑지만 강제로 흘리게 되는 건 반감이다. 여름은 잠깐의 순간을 반가워하는 계절 같다. 계속 덥다가도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망쳐도 좋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거리를 걷다가 올리브영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바람에 안도한다, 휴일엔 가끔 에어컨이 낼 수 있는 최저 온도로 설정해 가디건을 입고 이불 속에 누워있는 이 모순적인 순간 자체도 즐겁다. 이런 짧은 순간들이 있어야 여름을 버틸 수 있다. 행복의 길이가 짧다는 걸 느끼는 계절이다.


 여름은 보통 6월에 시작해 8월에 끝난다. 하반기의 시작을 여름과 함께하는데 머지않아 한 살 더 먹겠구나란 걱정의 그림자가 서서히 커진다. 허탈함과 아쉬움 그리고 왠지 모를 조급함. 여름의 온도와 맞물려 무기력증은 더 깊어진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강박이 몰려와도 날이 더우니까란 핑계가 생긴다. 그 좋아하던 풋살도 여름이면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3분만 뛰어도 힘든 풋살인데 가만히 있어도 힘든 여름에 풋살까지 한다면 아마 극한의 트레이닝이 아닐까. 무엇이든 에어컨이 풀가동되는 실내를 찾게 된다. 향기에 의지해 이리저리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우린 냉기의 향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우린 잠시나마 겨울잠을 자는 상상을 한다. 동굴과 같은 냉기가 머무는 실내를 찾아다니며 커다란 움직임을 취하지 않는 우린, 눈을 뜨고 여름잠을 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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