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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Jun 04. 2020

꿈꾸는 그녀들

역전의 드라마

엄마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이제 대학생이 된 아이 고3 때 알게 된 인연들인데, 아이가 끈이 되어 만났지만  이젠 상관없이 서로가 좋아 만나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이란 걸 만날 때마다 느낀다. 목소리가 드러나게 높은 사람도 없고, 자기를 낮출 줄 알고 서로를 생각하는 배려가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묻어나는 사람들. 각자의 선명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믹스커피의 설탕과 프림처럼 부드럽게 자신을 녹여낼 줄 아는 그녀들이다.


우리 나이쯤 되면 다 그런 것일까 싶다가도, 모두는 아니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간다.  살다 보니 세상엔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어쩜 저럴 수가 하는 상식 밖의 사람도 많이 봐 왔기에, 어쩜 나조차 누군가에게 한 순간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싶어 문득 지나온 자리에 괜한 신경이 쓰일 때도 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나를 낮추고 비워야 하지만 그 반대로 곧은 목으로 큰소리를 내어 꼰대 소리를 들을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늙어가는 것과 익어가는 것의 차이가 그런 것인가 싶고.


아이들이 졸업을 했지만, 우린 서먹함이 없다. 세월이 어수선함으로 몇 달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지만 카톡방으로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았기에  어제 만난 친구처럼  어색함은 없었다. 보통 자모 모임은 초등 1학년 때 이루어져서 쭈욱 이어가거나 중간에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아이가 고등학생이면 엄마들도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데 피로감을 느끼고 호응도가 적어 모임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이 모임이 매력적인 건, 무엇보다 편안하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이 가끔 모여 밥 먹고 차 마시고 수다 떠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적당한 조율과 따스한 공감이 필요하다. 나를 오픈했을 때 맞장구 쳐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가 없다면 심심하고 영혼 없는 만남이 될 것이고, 시간낭비 돈 낭비만 하는 의미 없는 만남이 될 것이다. 나를 열어 보이는 것, 들어주며 공감하는 것.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아니다. 판단의 눈으로 보지 않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용의 자세로 보아주기에 편안한 것이고 , 그럴 때 다음 만남도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선물받은 달팽이 크림


그날, 그녀에게 달팽이 크림을 선물 받았다. 아들을 군에 보낸 엄마들 사이에서 제법 입소문이 났다는 그 제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용기 바닥을 손가락으로 쓸어가며 크림을 바르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감사할 수가! 바쁠 텐데 아이를 통해 일부러 주문해 한 사람 한 사람 챙기는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예쁜 사람이 예쁘게 보였다. 전화해서 부탁하고 택배비 지불하고 가방에 담는 작은 수고 하나하나가 마음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선물 받은 케이크와 커피 쿠폰을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듯 내어놓은 엄마도 있었다. 달달하고 풍성한 시간이 거치는 것 없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치매 걸린 시아버지를 10년째 모시고 사는 이야기, 신혼초 시어른과 8년을 함께 살다가 극도의 스트레스로 마흔도 안된 나이에 폐경이 된 이야기, 첫아이 임신 때 밭농사 짓고 소 키우느라 몸무게가 오히려 2킬로나 빠진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모두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책으로 써도 몇 권이나 나오겠다 싶은 영화 같은 드라마 같은 인생극장이었다. 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그녀들의 살아내야 했던 인생 이야기를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혀끝에 커피의 쓴맛이 달아나 버릴 정도의 쓰디쓴 이야기, 마음이 부자인 마음 그릇이 큰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릇이 빚어지기까지 수없이 깨어지고 부서져 다시 빚어지고, 또 활활 타오르는 가마 같은 삶의 뜨거움을 견디어 냈을 그녀들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누군가는 역전의 드라마를 쓰고, 누군가는 막장 드라마를 쓴다. 모든 사람이 다 역전의 드라마 주인공이 되고 싶을 테지만 예습 없는 인생이라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다는 걸 삶의 어느 순간 알게 된다. 그러나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듯이, 오늘 뿌려진 씨앗이 없는 사람은 길쌈도 수고도 가뭄 걱정을 안 해도 될 테지만,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도 꿈꾸지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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