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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Jan 11. 2022

지하철에서 이방인이 된 나의 모습.

학교 연구소 겸임 연구원이 되었다. 부족한 사람을 위촉해 주신 관계자분들 생각해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으론 마음 뿌듯한 것이 있었는데 대학도서관을 교직원 신분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의학 서적보다 소설이나 문학책을 더 많이 대출받는 게 문제 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혜택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모교 도서관을 찾았다. 신관을 멋지게 증축한 걸 오며 가며 보기는 했지만 안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입구에 서니 왠지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다. 일단 건물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내 옆에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찍고 자연스럽게 들어가길래, 부스터 샷까지 맞은 나는 자신 있게 쿠브 방역패스를 읽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참 헤매고 있었더니 안쪽에 있던 도서관 직원이 나왔고, 그의 도움으로 (당연하게도) 도서관 앱을 깔고 바코드를 찍고 로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방문 목적을 밝히니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한 재학생들이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책 찾는 법, 대출, 반납, 서고의 위치 등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설명을 들으니 정말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쩐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에게 익숙한 공간은 야전이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고 말 콧잔등에서 하얀 김이 나오는 들판이거나, 깔짚이 말똥과 뒤엉킨 바닥이 내 안전화 밑으로 밟히는 마방이 내가 사는 곳이다. 여기처럼 조용하고, 바닥에는 유리같은 타일이 깔려있으며, 잠바를 입지 않아도 따뜻한 환경은 낯설었다. 보따리 하나 들고 처음 상경한 시골 아저씨 마냥 설명을 다 들은 후에도 나는 한동안 도서관 로비에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분은 얼마 전에 서울에 갔을 때도 느꼈다. 스물여섯 살까지 그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입도 후에는 서귀포댁 남편과 금악리 고원장으로 거의 제주도에만 머물고 있다. 그래서 어쩌다가 서울에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높은 빌딩과 화려한 상점가를 구경하고 있는 내 모습을 만나게 된다. 서울에서 특히 무언가 생소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다. 제주도에서는 어디를 가든 나의 차를 타고 갈 수 있지만, 대도시에서는 택시를 타거나 지하철을 이용해야 한다.


예컨대, 카카오 택시는 제주도에도 있지만 사용할 일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필연적으로 택시 앱을 누를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신식었다. 택시를 타고나니 목적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도착하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필요 없고, 현금은 물론이고 카드를 내밀 필요도 없이 거래가 끝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원하는 곳에 이동할 수 있었고, 기사분은 노동을 보상받았다. 단순히 편리하다는 느낌 이상으로 정말 다른 세상이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이 같은 경험은 지하철을 탈 때 극대화된다. 나도 이십대 중반까지는 서울에서 살았었다. 그때는 지하철 플랫폼 어떤 위치에서 타면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높은지, 어디서 환승해야 걷는 거리가 짧은지, 어느 역 자판기 커피가 싸고 맛있는지까지 통달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지하철을 타니 내가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우선 전혀 모르는 다수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시선을 스마트폰에 떨어뜨리거나, 무선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만 어찌해야 될지 모르고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쇼생크 탈출에서 50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레드가 도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두 손을 공손히 가방 위에 두고 남몰래 주위를 두리번 거렸듯이, 나 역시 배낭에 손을 얹고 주변 공기를 살피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사는 환경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목장에 들어서면 어른 키 만한 말들이 뛰어다니고 있고, 때로는 그 근육덩어리를 힘으로 제압하면서 일한다. 7000원만 내면 배부르게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함바집에서 목장형님들하고 점심을 먹고, 진흙이 튀어 더러워진 진료차를 몰고도 어디든지 다닐 수 있다. 이런 삶 속에서 맘 편히 숨을 쉴 수 있고, 나에겐 소중한 일상들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꾸 변화된 기술과 친해지려고 해보고, 안가본 곳에도 가보고, 몰랐던 사람들과도 만나려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화번호만으로 송금이 된다는 앱도 써보고, 아들방에 있던 에어팟도 귀에 꽂아봐야겠다.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한다는 K-팝도 찾아서 들어보고, 다음에 도서관에 들렀을 때는 마주치는 학생들과 좀 더 자연스럽게 대화도 해보고 말이다. 변화에 뒤처진 옛날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목적 같은 건 없다. 다만 자꾸 새로운 걸 접하고 경험하다 보면 나의 삶도 조금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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