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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May 02. 2022

'노동자의 날'에도 노동하다.

‘선생님 오늘 노동자의 날인데 일하세요?’


5월의 첫날 새벽부터 변함없이 말목장을 돌아다니면서 번식검사를 했다. 그러던 중 목장 외국인 직원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오늘이 그런 거창한 이름이 붙어있는 날이라는 것에 놀랐고, 그의 정확한 한국어 발음에 더욱 놀랐다. 대략 3월에서 5월까지 번식철에 인텐시브 하게 ‘노동’을 하는 입장에서, 5월 1일 하루만이라도 씨암말들 배란주기가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선지 오늘은 검사 결과가 별로 안좋았...)


오전에 번식검사를 끝내고 오후에는 망아지 지세교정술을 하러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목장을 찾았다. 치료 전 모습을 기록하려고 망아지 모습을 사진 찍으려니, 그 뒤로 펼쳐진 깨끗하고 파란 하늘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정말 끝장나게 좋았다. 일하려고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가는 곳마다 관광객의 렌트카가 깔려있었다. 나는 비록 일하지만 그들이라도 좋은 날씨와 가정의 달, 그리고 노동자의 날을 만끽하기를 바랐다.


사람마다 타고난 팔다리의 모습이 다르듯이 말도 체형이 천차만별이다. 허리가 긴 녀석이 있고, 하악이 상악보다 길어서 젖 먹는데 힘들어하는 망아지도 있다. 대부분의 편차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빠르게 달려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말들에게 다리가 못생긴 건 커다란 흠이 된다. 보기에 안 좋을뿐더러, 그대로 성장하면 나중에 관절이 하중을 올바르게 받지 못해서 관절염이나 골절 등의 위험성이 커진다. 당연히 상품성도 떨어진다. 그래서 어렸을 때 선별해서 지세교정술을 실시한다. 상태가 마일드 한 경우에는 목장에서 간단한 필드 서저리를 하고, 좀 심각한 케이스는 이차병원에 도움을 청한다. 이 수술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무릎 꿇은 공손한 자세가 된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고 수십 번도 더 해보았지만, 할 때마다 자세뿐만 아니라 마음가짐도 더욱 긴장하자고 다짐한다.


이동을 하는 틈틈이, 혹은 목장에서 말을 기다리면서 오늘 다 읽은 책이 있는데 히가시노 상의 ‘기린의 날개’라는 소설이다. 마침 이 소설에 제시된 주요한 갈등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와 사측 관리인의 대립이었다. 하필 노동자의 날에 읽은 책이 노사갈등에 관련한 작품이란 점이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의 결론은 전혀 다른 곳에서 끝을 맺지만. (이 소설에 대해 짧게만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다. 이야기의 이음새도 헐겁고, 결말은 황당한 지점으로 치닿는다. 한편으론 이런 맛없는 재료만으로도 400페이지가 넘는 한 그릇을 뚝딱하게 만드는 히가시노의 필력이 놀랍기도 하다.)


느닷없이 날아든 질문으로 시작된 5월의 첫째 날이 이렇게 저물어 간다. 한 달 정도만 더 고생하면 한숨 돌리게 될 것도 기대되고 결승점도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는 한편 아직도 임신에 성공하지 못한 씨암말들 이름도 떠오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이라도 편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노동자의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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