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를 읽고.

성장과 시간에 관한 이야기

by 고블린 연구소

6살 꼬마는 청량리역 승강장에 혼자 남겨진다. 엄마는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꼼짝 말고 여기 있으라고 했다. 10분이면 된다고 했다. 소년은 플랫폼 주황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두 발을 흔들며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린다. 해는 지고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회오리바람이 불어들었다. 엄마가 말한 시간의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몰랐지만, 소년도 그 시간이 벌써 몇 번은 지났다는 걸 깨닫게 된다. 시린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어보니 왼쪽 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와 휴대용 휴지팩, 오른쪽 주머니에는 보름달빵이 들어있었다. 그 때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한다. 봉지를 뜯고 빵을 한입 베어 무니 너무나 맛있었다. 하지만 6살 소년은 알고 있다. 이제 그 빵을 아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이와 같은 이야기를 이미 수없이 많은 영화, 드라마, 소설 그리고 현실에서도 접해왔다. 그럴 때마다 그 아이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코흘리개 시절에 역에 버려졌었던 경험, 친엄마의 자살, 아빠의 재혼과 계모의 학대, 그런 환경 때문에 말을 더듬게 된 것까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소년을 힘들게 한다. 고등학생이 된 그는 새엄마와 눈칫밥을 먹는 게 싫었다. 아침은 굶고 저녁은 동네 제과점에서 빵을 사가지고 돌아와 혼자 자기 방에서 때운다. 엉성하게라도 가정의 틀은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계모가 데리고 온 의붓 여동생의 성추행범으로 억울하게 몰려서 집 밖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된다. 경찰과 부모의 추적을 피해 소년이 도망간 곳은 매일 들르던 빵집이었고, 이름은 위저드 베이커리였다.


읽으면서 여러 장면에서 1년여 전에 읽었던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성장기 아이들이 마주쳐야 하는 여러 인물과 사건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나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칠 지도 되돌아보게 했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들려주는 충고가 정말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혹시 내 발끝만 쳐다보면서 어서 저 발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게 했던 건 아니었는지 반성했다.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는 마법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빵을 팔고 있었다. 기본적인 것으로는 시험이나 출장 등 긴장되는 상황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가능하게 해주는 푸딩, 싸우고 화해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스콘 등을 살 수 있다. 보다 어려운 마법으로는 얄미운 사람에게 먹이면 몇 시간 동안 실수를 남발하게 하는 악마의 시나몬 쿠키가 있고, 가장 비싸고 난이도 있는 제품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타임리마인더 머랭 쿠기도 구입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할 부분은 마법을 사용했을 때 예상치 못하게 발생하는 위험이나 부작용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타임리마인더 쿠키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다. 시간을 되돌려 여동생 성추행범으로 쫓기고 있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아빠가 새엄마를 소개했을 때 울며 불며 싫다고 했으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되짚어 본다. 하지만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누명을 쓰게 된 지금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니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설령 아빠의 재혼을 막았다 하더라도 그 선택 후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역시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다. 어떤 달콤한 마법도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것만큼의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고 들려준다. 과거에 하지 않아서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 난관에 부딪쳐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을 바로잡기 위해 미래에서 시간여행을 온 사람처럼 지금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사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성장 소설, 혹은 사회 초년생 영어덜트 대상인 듯한 제목과 표지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충분히 좋은 소설이었다. 오히려 지나간 시절과 후회되는 선택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중년 이후의 사람들이 읽는다면 보다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절대 교훈적인 충고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스토리가 펼쳐지고, 끝부분쯤 성추행 진범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과히 놀라운 반전이 독자를 습격한다. 청량리역에 혼자 버려진 꼬마의 사연에 마법같이 빨려 들어가서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도달한다. 책을 덮고 나면 성장과 시간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하게 된다.



“지금껏 잘 견뎌왔다. 앞으로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타임 리와인더를 쓰지 못하게 한 불의의 사고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안다. 누군가가 씹다 뱉어버린 껌 같은 삶이라도 나는 그걸 견디어 그 속에 얼마 남지 않은 단물까지 집요하게 뽑을 것이다.”


- 구병모 작가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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