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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Sep 17. 2022

'빨간 눈 괴질' 속에 갇힌 도시.

정유정 작가의 '28'을 읽고.

정유정 작가의 ‘28’을 읽었다. 치명적인 인수공통전염병이 창궐하는 도시 속에 갇힌 개와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 서있는 수의사라는 내 직업에 대해서도 여러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이제야 읽었을까 생각했다.

 

‘화양’이라는 서울 인근 가상도시가 배경이다. 지저분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개를 생산, 사육하던 농장주가 눈이 충혈된 지 사흘 만에 죽게 된다. 그곳에서 길러지던 개들도 같은 증상을 보이다가 고열, 폐출혈, 호흡부전 등의 경과를 거치며 폐사한다. 이렇게 시작된 전염병이 삽시간에 도시 전체로 번진다. 방역부서에서 역학조사에 나서지만 원인조차 밝히지 못한다. 이에 중앙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보이는 개들은 모조리 매장하고, 사람들은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봉쇄한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병원균과 함께 모두 소멸하라는 의미였다. 공권력이 개입을 포기해버린 도시는 금방 무법천지가 된다. 이 속에서 각자의 사연을 지닌 수의사 서재형, 119 구조대원 기준, 신문사 기자 김윤주, 간호사 노수진, 사이코패스 김동해 그리고 투견장 출신 개 링고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감염병이 퍼져서 외부로부터 차단된 인구 29만의 도시에서 일어났던 28일간의 기록이었다.

 

소설가는 극한 환경에 처한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가족이나 동료의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다가 곧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도 치료법은 고사하고 원인도 모르는 상황이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인도적으로 행동하지만, 인내심은 불과 일주일도 넘기지 못한다. 감염된 사람들을 자신들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무정부 상태의 길거리는 물리적인 폭력만이 법이 된다. 생필품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외부로부터 고립은 갈수록 견고해진다. 한계에 치달을수록 이기적인 감정만이 더욱 고개를 든다. 강도, 강간, 살인, 방화와 같은 일이 범죄가 아니라 일상이 된다. 잔혹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그럴때마다 슬쩍 몇 페이지 건너뛰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사람의 감춰진 본능이라는 걸 부정하기 힘들었다.

 

이 소설에서는 개의 심리나 움직임에 대해서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친구들이 살아 있는 채로 흙구덩이 묻히는 걸 보고 안타까워하거나, 강아지였을 때는 귀여워하다가 덩치가 커지자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 하는 모습 등이 그려진다. 좁은 투견장에서 상대방의 목을 물기 위해 도약하는 근육의 움직임이나, 매질을 당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신경의 변화 등을 해부생리학 책 설명처럼 정밀하게 묘사했다. 나무나 바위에 자신의 냄새를 묻혀두고 위치를 파악하거나, 별이나 달을 보고 방향을 잡아내는 능력 등도 새로웠다. 작가가 개에 대해서 학문적으로도 공부를 많이 하고 글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공 시간에 동물심리학이나 행동학 등을 배웠지만 솔직히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분야도 내가 하는 일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료받으려고 내 앞에 서 있는 동물이 지금 어떤 심리상태인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단순히 만지고, 청진하고, 주사 놓고,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고, 직장검사나 초음파로 뱃속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었다.

 

사람과 개가 교감하고, 때로는 반목하는 내용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살기 위해서 자신의 썰매개를 야생 늑대에게 희생시켰던 서재형은 평생토록 그 일을 가슴 속 돌덩이처럼 품고 살아간다. 그는 수의사가 돼서 남은 삶을 상처받고 버려진 동물들을 보호하는 데 바친다. 그의 진심은 개들에게도 전달이 되고, 그들 역시 재형을 동반자로 받아들인다. 너무나 당연하게 동물에게도 자신만의 세계가 있으며, 사고思考를 한다. 그들에게도 삶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였다. 책장을 넘기면서 동물들의 생명을 도와주는 나의 직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여러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진료현장에서 만나는 말에게 눈도 한번 맞춰보지 않고 그저 일의 대상으로만 대했던 것 같다. 거듭 반성했다.

 

우리는 가축전염병이 유행하면 전체 살처분이라는 카드를 손쉽게 꺼내든다.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게 된 닭, 돼지, 소 등은 잘 모르거나 못 본척한다. 인간을 그 동물들과 같은 상황에 몰아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28’을 읽으면서 지켜보았다.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근래에 들어서 인류를 위협하는 대규모 감염병의 유행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리고 병원체는 대부분 동물로부터 건너왔다. 좁은 지구에서 동물들과 균형 있게 공존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그들의 생명을 우리 것만큼이나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빨간 눈 괴질’을 소설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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