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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Feb 07. 2023

 '고독한 킬러' 영화를 읽다.

김언수의 '설계자들'을 읽고.

 소설가 김언수의 장편소설 ‘설계자들’을 읽었다. 청부살인 업계에서 암약하는 자객과 설계자들의 이야기였다. 인물들은 무협지에 나올법한 대사를 날리면서 유려한 칼부림과 화약 냄새 진동하는 총싸움을 보여주었다. 책을 덮고 나니 활자를 읽었다기보다는, 본격 ‘고독한 킬러’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수녀원 앞에 버려져있던 아기 래생을 ‘너구리 영감’이 거둬서 키운다. 너구리 영감은 대외적으로는 사설 도서관을 운영하지만, 실제로는 의뢰가 들어온 타겟을 제거하는 일을 수행한다. 래생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도서관 일에 발을 들이고 업무를 처리해 나간다. 설계가 내려온 데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자신의 명줄도 길게 이어지기는 힘들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어차피 정붙일 사람도 없는 인생이어서 큰 고민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스승이나, 동료였던 자객들이 방수포에 덮여서 실려오는 것을 보면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자신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설계자들과 나아가 그 위의 의뢰인들은 누구인지 말이다.


 래생이 배후인물들을 탐문하고 나서자, 집에는 소형 폭탄이 설치된다. 폭탄 제작자를 수소문해 보니 ‘미토’라는 같은 또래였는데, 그녀 역시 기구한 삶의 주인공이었다. 온 가족이 탄 차가 사고를 당해서 부모를 모두 잃고 동생은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미토는 자신의 가족에게 닥쳤던 교통사고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누군가 의도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실체를 밝히고자 그녀는 스스로 설계자가 된다. 미토를 찾아온 래생에게 자신 역시 설계자들과 그 배후세력들과의 승부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한다. 래생에게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자신과 함께 행동하는 것 뿐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래생은 미토의 만류를 뒤로하고 동료를 살해했던 설계자와 자객을 찾아 나선다.


 암살을 사업화하는 이런 세계가 정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을 보면 이런 세계가 정말 나의 일상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판에 관여된 사람들이나 공간은 사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도서관, 보안업체 사장, 이발사, 흥신소, 동물병원, 변호사, 엔지니어, 시골 읍내 의사 등이 등장해서 이야기가 더욱 내 피부에 들러붙도록 만들었다. 신문에서 읽었던 수많은 실종, 도로에서 벌어지는 교통사고,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인한 사망, 난간이나 계곡에서의 실족사 등이 사실은 누군가의 설계라는 작품 속 묘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주인공 래생에게는 묘하게 중독되는 매력이 있었다. 무던한 성격에 몸도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주변에 흔하게 돌아다니는 동네 백수형같은 이미지지만 현장에서는 냉혹한 1급 킬러로 변신하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인생이었기에 자신의 삶에는 그다지 애착이 없으나, 가까운 이들의 죽음 앞에서는 서서히 동요한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미토에게 돈가방을 던져주면서 이 업계를 떠나 동생과 살 길을 찾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몰려드는 자객들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폭풍간지 남주의 멋진 뒷모습이었다.


 작품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설계자 ‘한자’나 자객 ‘이발사’도 무조건 나쁜놈으로만 그려지진 않는다. 그들 나름의 애환도 설명되고, 래생과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구구절절 수긍이 간다. 피비린내 나는 사업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신사적이고, 내뱉는 말은 공손했다.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짧다는 점이다. 책을 덮었지만 아직도 궁금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예컨대, 주요 조력자인 미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점이 아쉽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빼앗아간 거물들과 한판 거래를 준비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막상 그 결과는 목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래생과 미토의 관계가 조금 애매하다. 같은 목표를 가진 동맹관계인지, 희미하게라도 러브라인이 이어져 있는지, 둘 관계에 대한 서사가 좀 더 길게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모든 소설에서 꼭 무언가 느끼거나 배울 필요는 없다. 넷플릭스나 유튜브보다 재미있었다면 충분하다. 키아누 리브스 '존 윅' 시리즈를 책으로 본 것 같았다. 먼 거리에서 잠복하면서 타겟을 조준한다거나, 자객끼리의 정직하고 피지컬한 단검 싸움, 업계 대기업에 잠입해서 자료를 빼오는 등 동적이고 영화같은 씬이 가득했다.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인데, 남은 페이지 두께가 얇아질수록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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