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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만 Apr 18. 2022

제주도 밥벌이 일기

4월은 무조건 가파도 -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안타까운 마음.

꿀 같은 내 휴일. 매일 기다려지는 내 주말. 오늘은 큰맘 먹고 가파도로 떠나기로 했다. 

"4월 제주도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누가 묻는 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4월은 무조건 가파도로 떠나세요."

운진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또 다른 섬. 온통 초록색 청보리로 뒤덮인 섬. 초록색 파도 사이를 걸으면 그동안 쌓은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간다. 가슴까지 푸르게 물들어지는 가파도의 청보리.

그 매력에 이끌려 나는 매년 가파도를 찾기 시작했다.  

표선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서귀포 구 터미널에서 202로 환승, 하모 3리에서 마지막 한 번 더 환승하면 드디어 운진항 도착.

표가 마감됐다고 해서 현장 대기했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한 시간 대기해서 겨우 예약한 12시 10분 출발 배. 가파도 가실 분은 사전예약을 권해드립니다. 

가파도로 향하는 배.

배를 타고 15분? 20분 정도 달려간 것 같다. 

파도만큼 출렁이는 나의 기대감. 

청보리 사이를 걸어갈 생각에,

얼큰한 해물짬뽕을 먹을 생각에,

두툼한 핫도그를 먹을 생각에,

나의 기대는 벌써 갈매기와 함께 날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                                                                                     

가파도 입구에 서 있는 돌댕이

"가파도" 이름이 새겨진 돌을 보면 이제 여행 시작.

도착하면 느끼겠지만 바람이 진짜 심하게 분다.

꼭 따뜻하게 입고 가시길. 예상은 했지만, 오늘도 바람 때문에 혼이 쏙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누군가의 모자가 하늘을 날고 있었고 저 날아가는 모자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물건일 텐데.









가파도 선착장 입구에 있었던 짬뽕집.

시간이 12시가 되니까 일단, 먹고 시작하자는 마음에 눈앞에 보이는 짬뽕집으로 들어갔다. 

바람 때문에 야외 테라스는 못 앉고 안으로 들어왔다. 

콩나물이 들어간 짬뽕이었는데, 진한 고기 육수가 아닌 해산물 베이스라서 가볍고 얼큰한 느낌.

정말 배가 고팠는지 국물까지 완벽하게 해치웠다. 

마라도에 짜장면이 있다면 가파도에는 짬뽕이 있다. 일단 먹으니 기분이 업된 느낌. 역시 여행은 먹방이다.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해볼까요?

가파도 해안길(왼) 초록으로 물든 청보리 길. 바람과 함께 출렁이는 초록 바다.

올해는 누가 청보리를 밀어 버리고 그곳에 유채를 심었네요. 유채꽃이 벌써 다 떨어졌어요. 청보리를 밀어버리다니. 충격적입니다. 


가파도는 이번이 4번째 방문이다. 4월에 가파도를 가는 이유는 청보리 때문이다. 4월 한 달만 볼 수 있는 초록세상. 제주의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가파도다. 

제주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작은 섬에는 학교도 있고 보건소도 있다. 작은 섬에서 느껴지는 사람 냄새를 맡으며 초록색 청보리 길을 걸으면, 온갖 근심 걱정이 눈 녹듯 녹아내린다.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시선을 두면, 한라산과 산방산을 볼 수 있는데, 이상하게 그럴 때마다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걷고 또 걸으며 점점 더 나에게 집중하게 되는 그런 시간을 가파도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올해 청보리 밭을 반이 유채밭으로 변해 있는 걸 보았다. 제주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유채가 이곳 가파도까지 점령한 것이다. 처음 본 사람들은 예쁘다고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댔지만, 나는 유채밭을 보고 울상이 되었다. 내 기억의 푸른 청보리가 통째로 뽑혀나갔으니까. 내 추억이 훼손당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이러나 초록 밭이 전부 노란 유채꽃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자연 그대로 두면 좋은데 굳이 왜 변화를 시도하는 걸까? 변화해서 아름다운 것이 있고 그대로 둬야 아름다운 것이 있는데. 

잔뜩 실망한 나는 핫도그 집으로 향했다. 

선착장 근처에 있는 핫도그는 "가파도 핫도그"에서 "김진현 핫도그"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설마 사장님과 맛도 바뀐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핫도그 집 도착. 

그러나. 4년 전과 동일한 사장님이 4년 전에 먹었던 그 맛과 똑같은 핫도그를 내게 주었다. 

한입 베어 문 그 순간 아까 느꼈던 서운함이 스르르 사라지면서 행복이 밀려왔다. 

4년 전 처음 방송에 나와 찾아오게 된 가파도와, 핫도그 집이었다. 4년 전의 나와 가파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맛. 내년 4월이 되면 나는 또 이곳을 찾아와 핫도그를 베어 물고 있을 것이다. 지나간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그리워하며 반성하면서.


2022년 먹은 핫도그와 4년 전 혼자 찾아 온 가파도 (4월 마지막에 찾은 가파도의 보리는 노랗게 익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며 보리밭을 지나던 과거의 내가 떠오르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목이 멘다. 

나는 다시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그동안 서운했던 일들과 부족했던 나와 게을렀던 나를 잘 달래서 앞으로 남은 날들을 잘 살아보자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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