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

청취의 힘!

by 김곤

1970년대였다. 내가 어렸을 때에 동장군이 말을 걸어오면 어머니는 집 앞마당에 빨래를 널었다. 그러면 옷가지에 남아있던 물이 금세 고드름으로 변신을 했다. 빨랫감들은 투명한 백색의 얼음 옷으로 치장을 했다. 꽁꽁 얼어붙은 하얀 겉옷을 벗기기 위해서는 빨래방망이로 세차게 내리쳐야 했다. 마른 명태를 두들겨 팰 때처럼. 그러면 두툼하게 걸치고 있던 조각들이 떨어져 나갔다. 녀석을 완전히 벌거벗긴 후에는 있는 힘을 다해 비틀어 짜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가장 뜨끈 뜨근한 안방의 아랫목 한편으로 가지고 가서 오징어를 말리듯 방바닥에 펼쳐놓는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가면, 아마 1시간 이상은 기다렸다. 방바닥에 바짝 누워있던 녀석들은 밑이 뜨거워 일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얀 김을 모락모락 품어댔다. 두꺼운 겨울바지는 다음날에 말랐다. 어떤 날은 물기가 남아있었다. 특히 바지의 가운데 부분은 잘 마르지 않았다. 오줌을 싼 것처럼 한참을 차갑게 하고 다녀야 했다. 추운 겨울날 건조기가 없던 시절, 각 가정에서는 이렇게 옷을 입곤 했다.



이번 겨울, 혹한으로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아파트 관리실의 안내방송이 스피커로 연일 흘러나와서 하는 수 없이 집 부근 빨래방을 이용할 때였다.


한 중년 남성이 마스크를 안 하고 통화 중이었다.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이 참다못했는지 한마디 했다.


"저기요. 마스크 좀 쓰시고 통화하시면 안 될까요?"

"........"


남성은 묵묵부답에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한 남성이 "마스크 좀 쓰고 하세요."라고 했다.


순간 통화 중이던 남자의 입에서 마스크도 안 쓴 채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상대방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방어차원에서 맞불 쌍욕이 터졌다.


때부터 서로가 거칠 것이 없었다.


"뭐라고 이 xxx야!!!!"

"뭐? 이 xxx가."


한 발 더 나가 서로가 말로써 공격을 하던 중 마스크를 쓰지 않고 통화하던 사람이 상대방을 가격해 버렸다.


오 마이 갓!.......


상대방이 한 말에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다.


큰소리나 욕설을 무기로 삼아 공격하고 상대방은 똑같이 맞받아치는 형국을 주위에서 가끔 본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정치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고 온갖 고성이 섞인 말이 오가는 꼴불견을 목도하기도 한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말로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한다. 부부싸움도 한쪽의 말이 흉기가 될 때 일어난다. 자녀들에게 한 욕설은 정신적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자신의 말을 토해내는 것에만 집중해 듣는 상대의 입장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는 않는다.



일방통행!


전의 일이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서 한 엄마가 자녀에게 고성으로 나무라는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옆을 지나다가 어쩔 수 없이 잠깐 스치듯 보았던 아이의 모습에는 반성보다는 수치심으로만 가득했을 것 같았다. 아마 아이는 엄마가 말하는 내용은 귀에 이어폰을 낀 째 흐릿하게 들리는 소리였을 뿐 한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도망치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그 시간이 평생 좋지 않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자녀에게 부모의 역할은 크다는 생각이다. 부모는 가정에서 지배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조력자 역할을 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이다. 그래서 딸이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그녀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필요할 때 정보 제공자의 역할에 머물려고 했다. 딸이 대학 진학을 고민했을 때다. 국내와 해외의 대학을 두고 그녀가 고민할 때 난 메일로 의견을 보냈고 판단은 자신이 직접 하길 원했다. 스스로 결정을 하니 효과는 배가 되어 짧은 기간을 준비했음에도 해외 명문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아내가 딸과 고등학교 때 갈등이 생기면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쟤는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 뭐라고 해야지 안 그러면 대들기만 하고 역효과만 나더라고”

자녀와 대화할 때도 시간과 공간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20년이 훌쩍 지난 얘기다. 예전에 회사에서 같이 근무했었던 한 동료가 있었다. 그는 동작이 좀 뜨고 보고서를 제때 올리지 않아 팀장으로부터 자주 불만을 샀다. 어떤 때는 사무실에서 1시간도 넘게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팀장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 모습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안타까웠다. 옆에 있던 나도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시간이 지나면 그는 나와 얘기하길 원했다.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주요 내용은 이랬다. 본인이 뭐가 잘났다고 매번 똑같은 잔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불만이 가득했으며 팀장을 무시하고 신경도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똑같은 정지 화면(팀장이 그를 책상 앞에 세워두고 긴 설교를 하던 모습) 한 달에 한 번 아니, 그 이상을 반복해 보았었다. 만약 팀장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가 귀담아듣지 않았을까? 팀장은 잘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했다. 아마 그는 리더의 덕목이 부족했을지도 몰랐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들 말한다. 소리의 높낮이와 강도의 차이일 뿐 감정대로 토해내는 말이 상대에게 자칫 흉기가 될 수 있다. 충고나 잔소리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며 따뜻한 마음도 담겨야 한다는 것을 그때 그 팀장은 알았을까.


누군가가 고성으로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에이 진짜. 짜증 나. 왜 저렇게 큰소리로 얘기하는데...., 조용히 말하면 어디 덧나나?" "다음에 또 저렇게 얘기하면 나도 절대로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하고 마음속으로 말할 것이다.


그래서 말할 때에 시간과 장소를 가리며 감정 조절을 하면서 일방통행식 발화자보다는 따뜻한 청취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청취의 힘!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7,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고 팝음악에 심취했던 사람들은 누구나가 아는 디제이(DJ)들의 음악방송이 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2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
박원웅과 함께.


이들의 방송 시간이 되면 카세트테이프를 오디오(그때는 전축이라고 했다.) 기기에 넣고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여지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60분을 다 채운 테이프는 버스 안에서 혹은 영어단어 외울 때 워크맨에 넣고 들었다. 좋아하는 여자친구나 친구가 생일이면 축하편지를 쓸 때 봉투 안에 곡명을 이쁜 글씨로 덧붙여 테이프와 같이 선물로 주기도 했다. 듣는 즐거움이란 한계가 없다. 산책을 하며 음악을 들을 때. 영화관에서 웅장한 오디오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듯 흐르는 음향은 청취자라는 역할에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이만큼 집중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듣지 않았거나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때는 없을까.



"조용히 해봐. 안 들려요."


가물에 콩 나듯 텔레비전을 볼 때 가끔 아내가 했던 말이다. 집중해서 보는 아내와 다르게 극 중 주인공들의 표정과 대사 등에 관심이 있는 내가 "연기 잘한다. 그렇지?" "배경음악 좋다."라고 할 때면 듣던 말이다.


일상에서 상대방과 언쟁이 있을 때 듣는 말도 있다.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 말을 끊고 들어오면 안 되지. 내 말부터 잘 듣고 얘기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도 귀의 신경세포에 집중하지 않으면 음악 감상을 하지 못하고 영화 속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어 재미를 오롯이 느끼지 못하거나 대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방의 말에 열중하는 사람과 같이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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