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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02. 2023

여태후(呂太后) 과연 악녀일까요

인체(人彘)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글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 돼지'가 됩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돼지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인체라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행위를 한 여태후는 한고조 유방의 부인으로 훗날 황후가 되고 유방 사후에 태후가 되어 한나라 2대 황제 혜제 시절 실질적인 국정 리더였습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황제 또는 제왕에 대한 기록인 본기(本紀)에 여태후를 올립니다. 일명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지요. 한나라 2대 황제이자 여태후의 아들인 혜제는 본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사마천의 시각에선 실질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는 여태후를 황제 급으로 인식하고 본기에 배치하였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사마천 후에 등장하는 사가(史家)들의 비판을 받긴 하지만 여기선 논외로 하겠습니다. 



여태후는 웬만한 남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정무적 감각이 뛰어났고 권력을 잡고 행사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발휘한 여인입니다. 그렇게 한고조 유방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초한쟁패 5년 전쟁 후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에 오릅니다. 그런데 유방이 조강지처(糟糠之妻)로 죽도록 고생한 여인을 외면하고 젊고 예쁜 척(戚)부인에게 눈길을 돌리고 척부인이 낳은 여의(如意)를 후사로 마음 먹게 됩니다. 여태후가 낳은 혜제와 노원공주가 있는데, 혜제가 태자로서 후사를 잇게 되어 있는데, 척부인이 끊임없이 베갯머리 송사를 벌여 유방이 반쯤 넘어간 상태입니다. 여태후 입장에선 초한 쟁패 시절을 시아버지와 아이들 그리고 가솔들을 이끌고 천하를 방랑하며 피난다닌 시절을 생각하면 피가 끓어오를 만큼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나요. 


심지어 유방이 항우와 치열한 승부를 벌일 때, 전쟁 초기에 항우의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여치는 이 기간 내내 초나라의 군영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때를 떠올리면 여태후 입장에선 유방과 척부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렇게 고생 고생하여 이제 황후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데, 척부인의 어린 아들을 후사로 올리겠다는 유방의 의도를 접했을 때의 당혹감, 절망감, 배신감, 분노 등이 엄청나게 폭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방과 여치가 만나는 계기를 기록으로 보면 유방이 대단한 관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추측할 수 있지만, 이러한 신비주의는 새로운 왕조에 대한 필연성과 정당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추가되거나 과장된 서술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엄격히 보자면 유방과 여치는 결혼 이후 평범한 농민들의 삶을 살았으며, 유방은 가정에 그리 헌신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람기가 많고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閑良)풍의 인물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며 돈 잘 쓰면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것이 그렇게 세력이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유방의 측근들은 전직이 천한 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유방은 훗날 황제가 되지만 젊은 날 정장(停長)이라는 한미한 벼슬살이를 하며 술값이 없어 외상으로 마셨고, 매사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었지요. 유방의 동서가 되는 번쾌는 개장수, 옥에서 근무했던 조참, 남의 장례식에서 피리를 불었던 주발, 마부였던 하후영, 비단 장수였던 관영, 젊은 날 냇가에서 배가 꼬르륵하자 빨래하는 여인의 밥을 얻어 먹은 한신 등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직업이 천하다고 해서 훗날 행적조자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내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장량, 소하, 한신 덕분이었다.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승패를 결정하는 사람은 장량이고, 전쟁터에 필요한 보급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소하, 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던 한신이다."


그래서 장량, 소하, 한신을 서한삼걸이라고 하지요.  


황후가 된 여치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유방의 총애를 받고 있던 척희(戚姬)였습니다. 척희는 절세절후의 미인이었고, 초한 전쟁 와중에 유방과 함께 전선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였습니다. 척희에게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인 유영이 선량하지만 나약한 성품인데 반해 여의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모두 타고난 왕자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유방이 태자인 영을 폐하고 여의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중신들의 반발로 일단 미루게 됩니다. 여태후 입장에선 척희 모자는 반드시 제거해야 두 발을 쭉 펴고 잠들 수 있었습니다. 절박했지요. 그래서 이미 정계를 은퇴한 장량(長良)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태자의 폐위를 막는 데 성공합니다.


위기를 넘긴 여후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면은 유방과 함께 한나라를 일으킨 공신(功臣)들을 처리하는 일에서 잘 나타납니다. 개국 초기 공신은 논공행상을 받지만 그 순간부터 황제가 경계하는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전제군주들이 개국 공신들을 잔인하게 제거합니다. 명나라 주원장이 잔혹하게 공신을 제거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반면 송나라 조광윤은 아주 유연하게 공신들로 하여금 권력을 내려놓게 합니다.  유명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입니다. 술자리를 만들어 공신들을 모아 권력을 놓고 지방으로 내려가 여유로운 인생을 누릴 것을 권합니다.  당시 함께 술자리를 한 석수신, 왕심기, 고희덕, 장령탁, 조언휘의 5대 공신들이 모두 야심있는 인물들이 아니었으며 5대10국의 혼란에 민심이 흉흉해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으로 공신들의 군대지휘권을 회수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룻밤의 술자리만으로 조광윤이 절도사들을 완벽하게 설득할 수있었는지 그 능력이 대단하지요. 


천하가 평정되자 장량은 스스로 은퇴하고 소하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한신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한신의 군사적인 능력을 두려워했던 유방은 그를 제왕(濟王)에서 초왕(楚王)으로, 다시 회음후(淮陰侯)로 봉호를 깎은 다음 4년간이나 수도 장안에 억류시키고 견제했지만 그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황제 유방을 위해 껄끄러운 한신을 제거한 사람은 여후였습니다. 그녀는 유방이 출타한 동안 한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과 함께 그를 처형했습니다. 유방과 한신은 피를 나눈 동지였는데, 여후가 적극적인 조치로 한신을 제거하였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은 양왕(梁王) 팽월(彭越)이었습니다. 백성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팽월은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던 길에 우연히 여후를 만나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고향으로 은퇴해서 조용히 살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여후는 일단 그를 낙양에 데리고 온 다음 유방에게 그의 신병처리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리고 여후는 팽월의 측근들을 협박해서 그를 반역죄로 모함하도록 한 다음 그를 처형했습니다. 그후 유방은 개국공신 영포(英布) 반란군과 전투하다가 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으며, 이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유방이 가장 경계한 것은 바로 여후의 지독한 권력욕과 잔혹하기 그지없이 냉혹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방이 마지막으로 제후와 군신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고 백마를 잡아 하늘에 예를 올린 다음 그들로부터 두 가지 조건에 대한 맹세를 받게 됩니다.


"첫 번째는 유(劉)씨가 아니면 왕(王)으로 봉해질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운 공이 없으면 후(侯)에 봉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지 않고 맹세를 위배하는 자는 제후와 군신들이 연합해서 응징한다."


는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유방 사후엔 그런 맹세가 전혀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흡사 일본 역사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에 다이묘들을 모아놓고 아들을 부탁한다는 유명을 남겼지만 그 효력이 전혀 없었던 것과 비슷하지요. 그렇게 유방이 죽고 열여섯 살의 아들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치는 태후의 신분으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가장 걸림돌이자 분노의 대상이었던 척부인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2대 황제인 혜제에게 


"황상 날 좀 따라오시오"


라고 하며 아들 혜제를 지하 창고로 끌고 갑니다. 그곳 바닥엔 척부인이 있었습니다. 여태후가 명령을 내려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파냈으며 독한 증기를 쐬게 해서 귀를 멀게 하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척부인의 모습을 보고 '인간 돼지'라고 하였습니다.  척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어린 황제 영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날 이후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면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혜제는 얼마 안 있다가 사망하고 여태후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런데 여태후가 궁중에선 비록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잔혹한 보복을 자행하지만,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사실 백성들 입장에서는 권력을 놓고 정치 세력들이 어떤 헤게모니 싸움을 하든 자신들의 삶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후가 자신의 라이벌인 척부인을 참으로 잔혹하고 잔인하게 처리하여 혹평을 받지만,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선정을 베풀었기에 사마천은 그의 책 '사기'에서 여태후를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태후가 척희 또는 공신들을 제거하는 것에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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