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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03. 2023

그리움 속으로

비오는 날 유월 사흘 날에



찻집 통유리 면을 부드럽게 타고 내리는 빗물을 말없이 바라봅니다. 가만히 앉아 금방 내린 커피 한 잔 위로 커피 향이 살며시 올라갑니다. 그리고 커피 마시는 것도 잊고 탁자에 팔을 괸 매 오랜 시간 여행을 떠나 기억 저 너머 아득한 그곳을 떠올립니다. 돌아보면 지난 삶은 그냥 평탄했고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 시간들 곳곳에 어려움이 왜 없었을까마는 큰 고통을 겪지 않고 두루 두루 지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농꾼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과 2남1녀 중 차남으로 형과 여동생보다 훨씬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인정을 풍부하게 누렸습니다.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이 그냥 좋았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주시는 폭포수 같은 사랑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참으로 엄청한 은혜였지요. 특별한 날이면 어머니가 풀기가 거의 없는 주황색 한복을 입으시고 절에도, 학교에도, 여러 행사에도 발걸음하셨고 저를 보면 그냥 끌어안고 품속에 넣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이 제 삶에 큰힘이 되었고 제 생을 지지해주는 강력한 바탕으로 남았지요. 제가 조금만 잘 해도 어머니는 그것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칭찬해 주셨습니다. 학교 생활 중에 제가 뭔가 잘못하면 선생님께 잘못했다고 반드시 말씀드려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으셨지만, 막상 선생님께서 제 사과를 받아들이고 넉넉한 웃음으로 돌려 보내시면 집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마루 앞에서 또 저를 크게 안아 주셨습니다. 시골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공부에 전념하라고 하숙까지 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형은 시골에서 대구에 올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제 하숙집에 들러 주인이 먹을 수박을 비롯한 온갖 먹거리를 주었습니다. 제가 잘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제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책상 위에 하얀 봉투가 놓여 있으면 누군가 다녀갔구나 하고 알게 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다녀가셨습니다. 금액도 상당히 커서 다 못 쓰고 주말에 시골에 가서 도로 돌려드리기도 했습니다. 


대구에서 공부만 하고 집에는 다녀가지 마라고 하셨지만, 시골 농사가 어디 따로 정핸 때가 있던가요. 늘 바빴지요.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대구고등학교 정문 앞으로 달려나가 서부정류장, 일명 성당주차장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탑니다. 127번, 126번 아니면 1번이 가장 기억나네요. 당시 제가 교실 청소 당번이 걸리면 우리집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대신 청소를 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일찍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늘 청소 당번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요. 그렇게 성당주차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 마을 달성군 논공면 위천1동 우나리에 내립니다. 


농번기라 마을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들판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방을 놓고 밥 한 그릇에 김치랑 간단히 먹고 물을 한 바가지 가득 마신 다음에 우리집 논으로 걸어갑니다. 어떨 때는 뛰기도 합니다. 그렇게 도착하면 아버지, 어머니, 형 셋이서 뙤약볕 아래 일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들판에 보일 때부터 저를 알아차리고 논머리에 나와 계십니다. 그리고 땀이 범벅된 채로 저를 꼭 안아 주셨습니다. 어머니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전혀 싫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야~야, 니 공부 안 하고 여~ 촌에 머 하로 왔노. 느그 아부지캉 히야캉 들일 다 하고 있는데, 제대로 먹고는 다니나, 배고프제 밥 먹어야 되겠제. 그라고 촌에 자주 오지 마라. 니 공부하기 바쁠 텐데. 으~이잉"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제 손을 꼭 잡고 반가워하셨지요. 어머니 손이 새카맣습니다. 어디 손만 그렇던가요. 환하게 웃으시는 얼굴 목덜미 발등 모두 흑인처럼 아예 시커멓습니다. 그래도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있으니 그냥 좋았지요. 자랄 때부터 어머니 곁에서 일을 많이 했기에 금방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며 일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형은 별 말 없이 그냥 묵묵히 앞서 나갑니다. 어머니는 제 곁에 딱 붙어 앉아 일을 하십니다. 제 어릴 때부터 그렇게 일하시는 것을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아깐 분명 공부하지 촌에 왜 왔느냐고 타박하셨는데, 진심이 아닌 거지요. 대구 소식도 궁금해 하셨습니다. 선생님들 안부를 많이 물어 보셨습니다. 정작 선생님들은 그 누구도 어머니 안부를 묻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어쩌다 우리 논 바로 옆에서 일하는 아지매가, 


"야~야, 니 왔네. 얼굴이 뽀야이 해가지고 시내 물은 역시 다른갑다. 우째 그렇게나 하얗노. 느그 엄마는 좋겠다. 니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하야이 해가지고 이리 와 있으이. 대구 생활 할 만하드나."

하고 하시기에 제가 대답했지요. 


"아이고 아이라예. 도시 가믄 아~들이 저보다 훨씬 하얘예. 저는 시커먼 핀이고예. 공부도 잘 몬합니다. 열시미 할라꼬 하는데 가~들이 진짜 공부 잘 하거든예."


아버지도 형도 여동생도 저에겐 살갑게 대해 주었습니다. 학교 성적을 잘 받아 우등상이라도 받아오면 대문 없는 집 마루에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저를 칭찬해 주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 집에서 하도 웃음소리가 많이 나오니까 옆집 아지매나 형수님들이 우리집을 넘겨다 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저를 축하한다면서 먹을 것도 가져와서 주시고는 마루에 같이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대문이 없었지만, 단 한번도 도둑이 들지 않았습니다. 가져갈 것도 없었겠지만 훔칠 것이 있다고 해도 우리 마을엔 도둑이 들었다는 말은 거의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문 없는 집이 꽤 있었지요. 그렇다고 대문 없는 집이 무슨 가난의 상징은 아니었습니다. 농사철에 소달구지에 볏단을 실어나르거가 농기구를 옮길 때 걸거칠까 대문을 열어 놓거나 아에 뜯어서 한쪽에 두고 해서 대문 없는 집이 많았을 뿐입니다. 남의 집에 놀러가는 것이 결코 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 집에 잠이라도 자려 하면 그집 아지매가 뭐든지 먹을 것을 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정말 좋아한 것은 감 홍시, 삶은 고구마 또는 군고무와 동치미 등이었습니다. 땅콩 삶은 것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겨울밤에는 한 집에 가득 모여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졌지요. 방 가운데 큰 이불을 펴놓고 모두 둥글게 둘러앉아 양 발을 이불 속에 넣어서 추위를 피하기도 합니다. 어쩌다 눈맞은 머스마와 기집애가 있으면 발가락으로 서로 사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번 신호를 보냈는데 상대 여자애가 반응을 보이지 않아 크게 실망한 적도 있었지요. ㅎㅎ. 


워낙 무던한 성격이라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친구들도 어린 시절엔 친구가 아니라 '동무'란 말을 더 많이 썼습니다. '동무 동무 내 동무 보리가 피도록 내 동무' 노래를 불렀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잡지 '어깨동무'도 있었지요. 그러다가 북한에서 동무란 말을 쓰기 때문에 '동무'란 말이 금기시된 것 같다고 누가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갑다 하고 살았습니다. 겨울 농한기엔 뒷산 민둥산에서 방학 내내 놀았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빈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갑니다. 산고개를 두어 개 넘어야 나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옵니다. 풀밭이 겨울이 되어 바짝 마른 상태가 되면 낫으로 베어 직사각형 모양으로 나뭇짐을 묶습니다. 새끼는 횡으로 세 번 묶어야 하고 그 사이는 솔가지로 적절하게 섞어 나뭇집이 무너지지 않게 합니다. 겨울 나무라 나뭇집이 꽤 커도 무게는 그리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게를 나뭇집에 깊숙히 넣어 지면 몸을 다 가립니다. 흡사 사람 두 발만 걸어가는 듯 보입니다. 


대부분 나뭇집 한 짐을 다 해서 묶어 지게에 지면 길게 행렬을 지어 고갯길을 넘어갑니다. 많을 때는 한 30명이 되었습니다. 한 줄로 나란히 걸어갑니다. 산 속 깊숙히 걸어가기 때문에 제일 뒤는 다들 꺼립니다. 그래서 제일 나이 많은 형이 맨 뒤에서 따라옵니다. 저는 중간쯤에서 걸어간 경우가 많습니다. 고개를 두 개 넘고 마지막 고갯길에 나뭇짐 지게를 받쳐놓고 잠시 쉽니다. 저 아래 우리 동네가 보입니다. 


어떤 아이는 평탄한 곳에 또 어떤 아이는 너럭바위에 덜렁 눕습니다. 무덤 위에 앉는 아이도 꽤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형이 저에게 옛날 이야기 하나 해달라고 조릅니다. 갑자기 부탁받은 상태라 생각이 잘 나진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대부분 임진록, 박씨전, 사씨남정기, 조웅전 등 고전 소설을 많이 들려주었지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어떻게 그런 책을 많이 읽고 이야기들을 들려 줄 수 있었는지 신기하지요. 


세월이 4~50년 훌쩍 넘어 지금도 고향 마을 형님들이 시골로 낙향하여 자기들과 함께 살면 안 되느냐고 말합니다. 그때처럼 옛날 이야기도 해주고 말이지요. 하지만 도시에 와서 산 지가 벌써 40년 가까이 다 되가는데 지금 고향마을에 들어가면 꼭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얼굴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만 넘어가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어쩌다 찾아가는 고향으로 하기고 했습니다. 


나무를 하러 갈 때는 남자애들만 갔지만 마을 앞 논바닥에 썰매를 탈 때는 그야말로 동네 아이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자애들도 당연히 모여 들었지요. 논바닥에서 썰매를 타기 때문에 위험성도 없었고, 해가 올라 녹을 즈음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디 가서 뭘 하든 동네 아이들이 정말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여름날 더울 때는 함께 수영도 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검은 백포로 빤스라고는 것을 입었고, 여자 애들은 위에도 뭔가 입고 물놀이를 한 것이 달랐지요. 지금 생각하면 쑥스럽지만 백포로 검정색 팬티는 수영복, 일복, 잠옷, 심지어 학교까지 입고 가는 교복 노릇도 하였습니다. 운동회 때도 그대로 입고 달려서 색이 바랜 빤스가 갑자기 찢어져 한 손을 잡고 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그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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