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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Oct 21. 2022

춘추오패 중 초장왕(楚壯王) 이야기

 불비불명 (不飛不鳴)    

      

『사기』「골계열전」에 이 말이 등장한다. 삼 년 동안 날지도 않고 또 울지도 않는다는 말인데, 더욱 높이 도약하기 위해 기회를 기다리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 배경을 추적해 보면 간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춘추 오패의 한 사람이자 훌륭한 군주로 꼽혔던 초나라 장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장왕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과인에게 간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오.”        

        

그 후 장왕은 3년 동안 국정은 돌보지 않은 채 주색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신 오거(五擧)는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할 결심을 했다. 그러나 차마 직간할 수가 없어 수수께끼로써 우회적으로 간하기로 했다. 오거가 ‘언덕 위에 큰 새가 한 마리 있는데, 이 새는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고 말하면서, 이 새가 무슨 새인지 맞춰보라는 수수께끼를 냈다.     

           

초장왕과 오거


장왕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3년이나 날지 않았다면 그 새는 한번 날면 하늘에 크게 날아오를 것이며, 한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오거가 낸 수수께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으니 물러가라고 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으나 장왕의 행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부 소종(蘇從)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전에 나아가 직간했다. 그러자 장왕은 꾸짖듯이 말했다.    

            

“경은 포고문도 못 보았소?”

“예, 보았나이다. 하오나 신은 전하께오서 국정에 전념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알았소. 물러가시오.”  

      

             

장왕은 그날부터 주색을 멀리하고 국정에 전념했다. 장왕이 국정에 임하자마자 간신을 비롯한 부정부패 관리 등 수백 명을 주살하고 수백 명의 충신을 등용했다. 그리고 오거와 소종에게 정치를 맡기자 어지러웠던 나라가 바로잡혔다. 이에 백성들이 장왕의 멋진 재기를 크게 기뻐했다. 초장왕이 간언하는 사람은 처벌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어도 그를 보좌하는 신하들이 수수께끼를 내거나, 직언을 통해 잇달아 간언을 올리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군주가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신하들이 훌륭한 방안을 제시해도 국정에 반영할 수가 없다.             

  

절영지연(絶纓之宴) 연회 석상에서 참석자들의 끈을 모두 끊게 하다. 초장왕 애첩을 희롱한 장수가 있어서 애첩이 그의 끈을 끊었다고 초장왕에게 말하자,촛불을 끄고 끈을 끓게 하다.

 대부분의 간언이 살벌하고 엄격한 군신 간에 행해지며, 간언을 하는 신하들도 개인의 이익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군주에게 과감히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런데 간언을 빙자하여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성취한 사례도 있다. 그것도 뛰어난 미모의 여인을 차지하고자 간언을 핑계로 삼았으니, 솔직히 이런 것은 간언이라고 부르기도 뭣하다. 

               

이 간언을 한 사람이 초나라 시대 신하 굴무(屈巫)인데 그의 간언을 소개하려면 당시 상황을 조금 설명해야 한다. 희대의 ‘하희(夏姬)’스캔들 과정에서 나온 간언이기에 더욱 그렇다.  


                   

희대의 하희(夏姬)’스캔들   

    

        

초장왕 16년 진(陳)나라에 하어숙이라는 대신이 있었다. 하어숙의 부인은 정나라 목공의 딸 하희였다. 그녀는 당대 절세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하어숙이 죽고 난 이후, 당시 진나라의 군주 영공(靈公)과 두 대신 공녕과 의행보까지 관련된 스캔들을 일으켰다. 군주와 대신 둘 그렇게 세 사람이 하희와 동시에 놀아난 것이다. 군주와 두 대신이 하어숙의 아들 하징서를 놓고 군주를 닮았느니, 아니 대신들을 닮았느니 하면서 희희낙락하는 것을 보다 못한 하징서가 영공을 활로 쏘아 죽이자 다른 이들은 초나라로 도망을 갔다.   

        

초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하징서를 처형하였다. 그리고 진을 군현으로 강등시키고 초나라에 귀속시킨다. 그런데 장왕이 잡혀온 하희를 보고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단번에 넘어가 버린다. 그래서 하희를 후궁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신하 굴무가 강력하게 간언하여 장왕이 뜻을 접게 된다. 굴무가 행한 이 간언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정이 아니라 순전히 굴무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속셈은 하희를 차지하는데 있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한번 살펴보자. 

           

“우리 나라가 진나라를 정벌한 이유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했다는 명분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폐하께서 하희를 차지하면 여자가 탐이 나서 진나라를 공격했다는 비방이 생겨날 것입니다. 더욱이 하희는 상서롭지 못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시집오기 전에 공자 만, , 새 사람과 동시에 정을 통하며 나라를 망치게 했으니 불길한 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상서롭지 못한 여인을 왜 취하려 하십니까?”    

    



  

굴무가 간언을 통해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 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초장왕은 귀가 열린 사람이라 신하의 간언을 잘 받아들였다. 여인 하나 때문에 자신의 야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었기에 하희를 단념하고 장군 자반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이 또한 굴무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 하였다. 이번에는 장왕의 아들 태자 자측도 하희를 탐낸다. 하지만 굴무가 다시 설득하여 부인과 사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하 연윤양공(連尹襄公)과 혼인을 시킨다.    

       

그 후 연윤양공이 싸움에 나가 전사한 후, 하희가 연윤양공의 아들과 바람이 나자 굴무는 장왕을 설득하여 하희를 친정인 정나라로 돌려보낸다. 그 후 초나라에서 제나라로 사신을 보낼 일이 생기니, 굴무가 자진하여 나서서 제나라로 가지 않았다. 대신 정나라로 가서 하희를 차지하고는 초나라로 돌아오지 않는다. 굴무의 끈질긴 집념이 무섭다. 굴무는 간언의 형식을 빌어 교묘한 계책을 실행하여 15년의 세월을 기다려 하희와 사랑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건 철저히 사적인 욕망에 불과하였다.     

                 

굴무에게 자신과 태자가 모두 농락당한 꼴이 된 장왕은 굴무의 가족을 몰살시킨다. 굴무는 이에 한을 품고 신진 강국으로 떠오르던 오나라로 가서 초의 군사정보를 제공하고 군대를 훈련시켜 초나라를 친다. 오직 한 여인 하희와 살기 위해 그 오랜 세월 집요하게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굴무가 자신의 가족을 몰살당하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하희와 사랑을 이루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희생당한 가족들은 또 무슨 죄인가. 하희가 아무리 절세미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가정과 국가를 붕괴시킨 이 스캔들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유향의 『열녀전』에서 하희를 일러 

          

“세 번이나 왕후가 되었고, 일곱 번이나 대부의 아내가 되었다. 여러 공작과 후작들이 미혹되어 정신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三為王后,七為夫人,公侯爭之,莫不迷惑失意”     


라고 하였다. 다만 하희는 왕후가 된 적은 없다.     

          

춘추오패-제환공, 송양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혜전탈우(蹊田奪牛)               

 

초장왕 시절 하희 스캔들이 일어났던 당시 간언을 빙자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사랑을 목을 매다시피한 굴무와 달리, 진정으로 군주를 깨우쳐 국정을 함께 고민한 간언도 함께 나온다. 밭을 밟았다고 소를 빼앗다는 뜻을 가진 ‘혜전탈우’의 신숙시(申叔時)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희 스캔들에 나오는 굴무의 간언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직간이 아니라 비슷한 사례를 들어 군주를 깨닫게 한 풍간(諷諫)에 해당한다. 간언을 듣는 군주도 신하의 진심 어린 충고를 별다른 나쁜 감정 없이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숙시의 간언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혜전탈우에 관한 기사는 『춘추좌씨전』 선공11년(기원전 598년) 기록에 나온다. 춘추오패 중 마지막 패자 초장왕이 중원의 소국 진(陳)나라에서 하징서의 군주 시해 반란이 일어나자 그 반란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출정하여 그 주모자인 하징서를 잡아서 처형한 다음 진나라의 사직을 멸하고 그 땅을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아 버렸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에 초장왕의 대신이었던 신숙시(申叔時)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는 복명만 하고 물러나갔다. 신숙시가 보기에 초장왕의 행위가 마땅찮았기에 그렇게 복명만 하였던 것이다. 이에 장왕이 사람을 보내어 신숙시에게 말하기를, 하징서가 무도한 짓을 하여 그의 임금을 죽였기 때문에 장왕 자신이 여러 제후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그를 죽였다고 밝힌다. 아울러 제후나 현공들은 모두 장공에게 축하의 말을 하는데 신숙시만 왜 축하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신숙시가 말한다.  

         

“어느 농부가 소를 몰고 길이 아닌 밭을 가로 질러 건너가며 한창 자라는 곡식을 마구 짓밟았습니다. 이에 밭 주인이 대노하여 그 소를 빼앗았습니다. 이 사건을 대왕께 호소하면 어떻게 처결하시겠사옵니까 ”     

하고 물었다.           



초장왕이 신숙시의 물음에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초장왕의 견해는 이렇다. 농부가 소를 몰아 농작물을 밟게 한 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가 크지 않으니 피해에 해당하는 보상만 요구해야 하는데, 소까지 빼앗은 행위는 너무 심하다. 장왕 자신이 이 사건을 처단한다면 소를 밭으로 몰았던 자는 꾸지람 정도에 그치고 소를 찾아 돌려주겠다. 그대 생각은 어떠냐고 답한다. 

          

그러자 신숙시는 이 일은 그렇게 현명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임금이 정작 진나라 문제는 왜 그렇게 처리하나고 면전에서 공박한다. 하징서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하징서가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아니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벌했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진나라를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아버린 것은 밭을 밟았다고 소를 빼앗는 밭 주인과 다르지 않기에 축하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초장왕은 신숙시의 말에 크게 깨닫고 즉시 진나라를 원상 회복하도록 조처하였다. 이후로 죄보다 벌이 무거운 경우를 해전탈우에 비유하여 일컫는다.      

              

신숙시의 간언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징서의 군주 시해의 배경을 면밀하게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는 신숙시의 간언을 기꺼이 수용한 초장공의 자세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모두들 칭찬하는데 한 사람이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을 하게 되면 사람의 감정상 그렇게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장공은 넓은 마음으로 신숙시의 말을 받아들여 국정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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