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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Oct 18. 2022

진문공(晉文公) 천하 방랑 19년

19년 천하 방랑, 아무도 배반하지 않았다

               

진문공 19년 방랑 끝까지 함께 했던 참모들


진문공 중이에 관한 한자 성어 중에 대표적인 말이 바로 퇴피삼사(退避三舍)이다. 퇴피삼사란 전쟁 중에 대치하고 있는 적군으로부터 3사(90리)를 물러난다는 뜻이며, 충돌을 피하기 위해 멀찌감치 물러나거나 남에게 양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이가 19년간 천하를 기약없이 방랑하던 시절 초나라 성왕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초성왕(楚成王)에게  자신을 도와주는 데 대한 보답으로 훗날 부득이 진과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진나라 군대를 3사나 뒤로 물리겠다는 약속을 한다. 사(舍)란 30리를 말한다. 춘추시대에는 군대가 행군할 때 하루에 1사를 움직였다. 따라서 3사는 90리로 3일의 행군거리에 해당하였다.                

아무리 자신이 상대방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이런 약속을 지켜가면서 전쟁에 임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초성왕도 그 약속을 굳게 믿은 것도 아니다. 막강한 강국 초나라 군주의 입장에서 비렁뱅이 신세에 불과한 진문공 중이의 약속을 믿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중이의 약속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진나라를 격파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 기약없이 천하를 떠돌고 있는 진문공이 우선 그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서 상대방에 했던 약속에 무슨 무게감이 있었겠는가.          

      



진문공 일행의 초라한 행색을 보면서 훗날 자신과 천하를 걸고 대회전을 펼칠 것을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런 예상도 없을 터인데 퇴피삼사의 약속을 지키리라고 믿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 전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약속을 지키려 하다가 만약 전쟁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두고 두고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 아닌가. 진문공은 그래도 그 약속을 지켰다. 실제로 천하의 패권을 겨루는 결정적인 전투 성복지전(城濮之战)에서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고도, 대승을 거두면서 광대한 남방의 강국 초나라를 격파하여 천하의 주인이 된다. 그 내막이 참으로 궁금하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초나라와 진나라가 전쟁을 벌였을 때 일이다. 한 장수가 말했다.           

“왜 후퇴를 하시옵니까?” 문공이 말했다. “지난 날 초나라에 있을 때 두 나라 군대가 대치하게 되면 내가 먼저 삼사(三舎)를 후퇴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어찌 그것을 위배할 수 있겠는가?” 

                   軍吏曰:“為何退?” 文公曰:“昔在楚, 約退三舎, 可倍乎!”     

     

중이가 어떻게 19년간 천하를 방랑해야 했는지 그 배경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진문공 중이의 부왕 진헌공에게 아들이 셋 있었다. 태자 신생, 그리고 중이와 이오 등이었다. ‘진헌공’은  젊은 시절 아버지 진무공의 후궁이자 제환공의 딸인 ‘제강’과 간통하여 아들 신생을 낳았고, 융(戎)에서 데려온 두 여인 중 호희(狐姬)가 중이(重耳)를 낳았고 또 다른 여인이 이오(夷吾)를 낳았다. 그리고 헌공은 재위 5년에 여융(驪戎)을 정벌하고 여희(驪姬)와 여희의 동생을 얻었고 이들을 몹시 총애했다. 여희가 해제를 낳았고 여희의 동생이 도자(悼子)를 낳았다. 이 여희가 문제의 인물이다.     



          

기원전 656년에 진헌공이 미모가 출중한 여희의 감언이설에 속아, 사리를 분별할 능력을 상실한 채 태자인 신생(申生)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한다. 나아가 여희를 황후로 삼고 그녀의 소생인 해제를 태자로 삼았으며, 공자 중이와 이오마저 죽이려고 하였다. 진헌공은 중이와 이오가 태자인 신생과 공모하여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내려 했다는 죄명을 씌워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여희의 교활한 술수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었다.         

       

포성을 지키던 중이는 아버지의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오자 대항하지 않고 적(翟)나라로 도망갔으며, 굴성을 지키던 이오는 아버지가 보낸 토벌군과 1년 넘게 싸우다가 패하여 양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이오도 중이가 달아난 적나라로 가려했는데 그의 참모인 기예(冀芮)의 충고를 받고 양나라로 떠난다. 중이와 이오가 함께 적나라로 도망가면 진헌공이 군대를 파견할 것이고, 소국인 적나라가 감당할 수 없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예가 강대국인 진(秦)과 가까이 있는 양나라로 가자고 제안하였다. 언제든지 진나라의 군대를 빌려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논리로 설득하였다. 

      

이때 적나라로 피신한 중이의 나이가 43살이었으며, 중이를 따라 나선 사람은 외숙부인 호언(狐偃)과 가신인 조쇠(趙衰), 선진(先軫), 가타(賈佗), 위무자(魏武子), 개자추(介子推), 호숙(壺叔), 전힐(顚詰), 사공계자(司公季子), 호모(狐毛), 가륜(賈倫) 등이었다. 이 때만 해도 그리 오랜 세월 천하를 방랑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 중이는 열일곱 살 무렵부터 호언, 조쇠, 가타 등을 가까이하며, 이들 참모들의 건의를 충실하게 받아들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고, 변함없는 배려와 존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샀다. 그 정도로 중이에게 남다른 인간적 풍모가 넘쳐 흘렀다. 그래서 중이가 망명을 떠나자 이 사람들 모두가 따라나선 것이다. 그리고 19년이란 긴긴 세월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는 천하방랑 기간에 따라나선 참모들 그 누구도 진문공을 배반하지 않았다.        

       

진문공 19년 방랑 역정

 

당시 평균 수명을 감안할 때 43세라면 훗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나이였다. 그렇다고 후사를 보장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천하를 방랑해야 하는 중이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기약없는 방랑의 길을 함께 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들의 행적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중이의 인품이 너무나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20년 가까이 중국 그 넓은 천하를 주유하고 방랑할 때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연이어 파견되는 자객들의 위협도 끝없이 이어졌다.   

             

본국에서 진헌공이 여희의 사주를 받아 지속적으로 자객을 보내고 그 위험에 오롯이 노출된 진문공 일행은 하염없이 천하를 방랑하며 내일을 도모할 뿐이었다. 여희뿐만 아니다. 훗날 중이보다 먼저 왕위에 오른 이복 동생 이오가 혜공이 되어, 형 중이를 암살하기 위해 사인피(寺人披)를 적나라에 보낸 적도 있었다. 중이의 19년 천하 방랑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농부가 준 흙    

           

부왕 진헌공이 세상을 떠나자 진나라 안에 반란이 일어나 여희와 그 아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반란 주도세력인 이극과 비정은 국외에서 떠돌고 있던 중이에게 먼저 귀국하여 제위에 오를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중이는 간곡하게 거절한다. 중이 자신은 부친의 명도 거역하고 나라에서 도망쳤으며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도 모시지 못해 귀국할 수 없으니 다른 공자를 추대하라는 것이었다. 이건 핑계에 불과했다. 오히려 참모들과 당시의 정세를 면밀하게 살피고 아직 귀국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인식하고 내린 판단이었다. 그런데 중이와 달리 탐욕적이었던 이복 동생 이오는 반란 세력의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여 귀국한 뒤 제위에 오른다. 이 사람이 바로 진혜공이다.        

   

그런데 진혜공 이오에게 국외에 있는 이복 형 중이의 존재는 가시와 같았다.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 중이 일행을 제거하려고 했다. 어느 날 진혜공이 보낸 자객이 적나라에 왔을 때 중이 일행은 이미 제나라로 떠난 뒤였다. 중이를 살해하는데 실패한 진혜공은 중이가 제나라로 도망갔다는 말에 추격을 멈추게 하였다. 중이 일행이 제나라로 가기 위해서 위나라의 오록(五鹿)을 지날  때의 일이다. 너무나 허기가 져서 마침 밭에서 김매기를 하는 농부에게 밥을 동냥하였다. 농부는 그들을 놀리며 일부러 바가지에 흙을 퍼담아 갖다 주었다. 공자 중이가 화를 내면서 농부를 채찍으로 때리려고 하자, 조쇠(趙衰)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공자! 분노를 삭이시지요. 밥 대신에 흙을 가져다 준 것은 하늘이 농부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토지를 내리려는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중이는 마음이 풀려 흙을 조용히 밭에다 뿌리고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농부의 조롱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아 단번에 칼을 뽑아 죽이고 싶었을 테지만 중이의 특급 참모였던 조쇠는 역시 달랐다. 천하를 방랑하던 중이 일행이 그 어느 곳에서도 오라는 곳이 없는 절망적 상황에 봉착하였을 때도 조쇠는 주군에게 냉정하게 처신할 것을 간언한다. 한 끼 밥이 없어서 극도로 배고픔을 느낄 때에 농부가 조롱하며 주는 흙덩이에 중이 일행이 느낀 심정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쇠의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중이도 그릇이 정말 큰 인물이었다. 실로 오랜 세월 기약없이 천하를 방랑하면서도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 국군의 자리에 오를 것이란 희망 속에 나눈 군신간의 대화에서 큰 감동을 준다.                  

   

배가 고파 동냥을 구하는 중이 일행에게 바가지에 흙을 담아 주면서 조롱하는 농부의 행동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편안한 시절에는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고난에 처해질 경우엔 주위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도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특히 배고픔은 그중에서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이 아닌가. 중이 일행이 배가 고플 때 그 농부가 흙덩이가 아니라 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가져다 주었다면 중이 일행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감동스러워했을까.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주 작은 음식이나 따뜻한 한 마디 격려도 그 사람에겐 생사의 기로에서 다시 일어서는 엄청난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이다. 희한하게도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지면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냉랭해진다. 평소 그렇게 친하던 사람도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갑자기 어렵게 사는 사람의 곁을 떠나거나 냉정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 진문공 중이 일행에게 농부가 흙덩이를 주면서 조롱해도 그 부하 조쇠가 흙덩이를 토지로 좋게 해석하여 큰 의미를 준다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농부가 조롱하며 준 흙을 토지로 해석하는 것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서 앞에서 언급한 퇴피삼사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람이 아무리 궁지에 몰려 한 약속이라 할지라도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초 성왕과 약속하다       

        

중이 일행이 여희의 흉계 때문에 진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비참하게 전전하다가 초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중이가 도착했을 당시 초 성왕(成王)은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망이 컸다. 그도 중이 일행이 초나라에 도착하자, 중원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중하게 중이를 접대했다. 초나라는 남방의 광대한 영토를 가진 강국이었지만 언젠가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 나라였다. 중이는 초왕의 환대가 감격스러울 정도로 고마웠지만, 중원을 호령하는 두 강국인 진과 초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었기에 원칙론적 입장만 보였다.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진문공 중이가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리가 없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일일 뿐이다.      

지금 자신이 비록 망명객의 신분으로 언제 어디서 비명횡사할지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지만, 언젠가 조국 진나라로 돌아가 제위에 오르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으니 초성왕의 제의가 갖는 무게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평범한 인물이라면 지금 당장 눈앞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얼렁뚱땅 답했겠지만 중이는 그렇게 가볍게 처신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군가 극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도와주면 무엇이든 약속하겠다고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영토이든 백성이든 자신만 살아날 수 있다면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약속이라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이는 달랐다. 초성왕이 지금 중이를 도와주는 것도 훗날 언젠가는 자신의 조국 진나라를 공략할 계락의 일부였음을 왜 모르겠는가.    

            

천하 쟁패를 꿈꾸는 한 나라의 국군이라면, 그것도 남방의 강대국인 초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그 또한 상대방인 중이의 인물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었을 터. 어느 날 초성왕이 중이를 제후의 예로 대접하고 어느 날 잔치에 불러 직접적으로 물었다.      

     

   “내가 지금 공자를 도우면 공자는 나중에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화살 깃털에 쓰는 새 깃이나 짐승 가죽은 물론이고 상아, 코뿔소 뼈와 같은 진귀한 물품도 마땅히 초나라에 있으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광대한 영토를 지닌 초나라에 희귀한 물건도 많이 있었다. 중이나 초성왕 모두 그런 금은보화나 진귀한 물품에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초성왕의 입장에서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호령하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영토 문제가 중요했다. 일종의 중원 진출 교두보가 될 수 있는 곳을 생각하고 그렇게 제안했다. 하지만 지금이나 고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국가의 영토 문제는 그리 만만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중이도 영토 떼어주는 약속을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도 초 성왕은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 보상을 요구했다. 중이는 야심만만한 성왕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예민하게 알아챘고, 이어 정중하면서도 침착하게 ‘만약 왕의 힘을 빌려 진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약속하건대, 훗날 두 나라에 전쟁이 벌어져 두 나라 군대가 서로 전장에서 마주치면 자신이 삼사(三舍)를 물러서겠다. 이렇게 해서도 왕의 관용을 얻지 못한다면 그때는 자신은 할 수 없이 왼손에는 채찍과 활을 쥐고 오른쪽엔 활집을 매고 왕과 한바탕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응수했다.       

 

성복전투-퇴피삼사 약속을 지키고도 진문공이 승리하여 패자가 된다.


             

분초를 다투는 전장에서 3일 행군 거리라면 전투의 승패를 결정할 수도 있는 시간이요 거리에 해당한다. 이 말에 초의 영윤 자옥(子玉)이 깜짝 놀라며 중이를 죽일 것을 초왕에게 청했다. 그러나 성왕은           

“중이 공자는 뜻이 원대하고 생활은 검소하다. 말이 화려하지만 예의에 맞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충성스럽고 유능한 신하들이다.”          

라며 자옥을 말렸다. 실제로 중이는 훗날 천하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회전인 성복전투에서 이 약속을 굳게 지킨다. 물론 자옥이 오만방자한 나머지 진나라의 계략에 빠져 초나라 군대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하는 바람에 국면을 그르친 측면도 있다. 성복전투에서 남방의 강대국 초나라를 격파한 진나라는 천하의 맹주의 자리에 오른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히 지배했을 춘추 전국 시대에 진문공 중이가 참으로 드물게 약속을 굳게 지켜 사람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키지 않아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약속이었기에 진문공의 약속 이행은 놀랍다. 자신의 입으로 굳게 약속한 것도 하루 아침에 바꾸어 버리는 우리네 현대 사회 위정자들이 본받았으면 좋겠다.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진문공 중이의 인품을 엿보게 하는 것이『좌씨전(左氏傳)』 희공25년 사료에 나온다. 이 또한 진문공의 ‘신뢰’에 대한 확고한 인생관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신(信)은 국가의 보배다. 그것으로 백성을 지키는 것이다.

                  信國之寶也, 民之所庇也.”  

         

위의 기록은 진문공이 제후국을 정벌할 때 원(原)을 공격하면서 말한 것이며, 신뢰에 대한 진문공의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다. 신뢰의 중요성은 시대를 뛰어넘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현대 사회에도 더욱 중요시된다. 존 멕스월의 『리더십 21가지 법칙』 91쪽에 보면 리더십의 핵심 기반이 ‘신뢰’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온다.           


   신뢰가 리더십의 기반이다. 신뢰를 쌓으려면 리더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능력, 인간관계 그리고 성품이다. 능력과 관계되는 잘못은 용서해줄 것이다. 당신이 리더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 성장단계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성품에 결함이 있다면 사람들이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성품에 관한 한 사소한 잘못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모든 유능한 리더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펩시콜라 회장 크레이그 웨더럽(Craig Weatherup)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당신의 정직한 실수에 관해서는 관용을 베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당신에게 보내는 믿음을 배신하게 되면 그들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는 무척 힘들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신뢰를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자산으로 생각하고 소중하게 다루기를 권하고 싶다. 상사를 속일 수는 있지만 동료와 부하 직원들을 속일 수는 없다.” 

               

   성품이 신뢰를 낳고 신뢰는 리더십을 낳는다. 그것이 ‘굳건한 기초의 법칙’이다. 그냥 신뢰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신뢰가 쌓이는 것이 아니다. 항상 진실한 자세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인간적으로 배려하면서 획득한 결과를 통해서 신뢰는 형성된다. 리더가 훌륭한 성품을 갖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인간적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굴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리더로 신뢰한다. 리더의 좋은 성품은 구성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뿐 아니라 구성원 자신과 조직에도 강한 믿음을 갖도록 해 준다.  

              

현대 사회에서 리더가 신뢰감을 갖고 있지 못하면 리더로서의 존재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인데, 실제로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신뢰이다. 아래 사람이 윗사람에게 간언할 때도 신뢰감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간언할 때도 간언의 내용보다 형식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간언하는 사람이 역량이 미흡하거나 군주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논리정연하게 설득한다고 하더라고 군주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갈택이어(竭澤而漁)         

      

이제 다시 진문공의 삶으로 가 보자. 진문공의 천하 방랑은 거리도 거리려니와 그 과정이 정말 험난했다. 그야말로 장정(長征)이었다. 본국에서 진문공의 일행을 노리는 자객이 언제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른다. 그런 엄청나게 극한적인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었다. 19년 긴 세월의 천하 방랑을 끝내고, 중이는 귀국한 뒤 드디어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주 양왕 20년인 기원전 632년 과연 진과 초 사이에 '성복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성복전투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천하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대회전으로 유명하지만 전투에 관련된 일화도 풍부하다. 앞에서 언급한 ‘퇴피삼사’와 함께 ‘갈택이어’도 유명하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먼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갈택이어(竭澤而漁)를 보자. 『여씨춘추(呂氏春秋)』·효행람(孝行覽) 〈의상(義賞)〉에 나오는 말이다. 갈택이어는 ‘연못을 다 말리고 고기를 잡다’라는 뜻인데 그 유래가 특별하다. 진문공이 성복에서 초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였을 때 초나라 군사의 수가 진나라 군사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진나라가 승리할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다 호언에게 물었다. 초나라에 비해 중과부적인 상황이라 좋은 방법이 없을까라는 진문공의 질문에 호언이 답했다.                

“신이 듣기에, 번다한 예절을 중시하는 자는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않고, 싸움에 능한 자는 속임수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옵니다. 그러니 속임수도 한번 써 보시지요.”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생존 게임인 전쟁에서 속임수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승리를 위한 속임수는 정당화되고 훗날 전술 전략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한다. 전쟁터에선 평소의 논리가 결코 통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정당한 방법이 어디 따로 있던가. 오직 이기기 위한 수단과 책략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호언의 제안은 충분히 수용할 만한 것이었다. 진문공은 호언의 말을 옹계에게 들려주며 계책을 물었다. 옹계가 말했다.  

                   

“못의 물을 모두 퍼내면 물고기를 모조리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에는 어떻게 되는지요. 그때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불태우면 짐승 또한 깡그리 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요. 지금 당장 속임수야 쓸 수 있겠지만 뒷날에는 다시 쓸 수 없을 것이옵니다. 속임수는 결코 장기적인 계책은 될 수 없사옵니다.”       

        

전투가 끝나고 승리를 거둔 후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진문공은 호언보다 옹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 뜻밖의 평가였다. 실제 전투 상황에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 하면 모든 것이 정의가 된다. 전투에서 패했을 때 인의예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호언의 제안이 현실적이며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도 진문공 중이가 호언보다 도덕군자에 가까운 발언을 한 옹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호언의 제안을 수용하여 승리하였는데도 말이다. 좌우 신하들이 의아해하자 진문공이 그 이유를 말했다.      


“옹계의 말은 백세의 이로움이고, 호언의 계책은 일시적인 방책에 불과하다. 어찌 일시적인 방책을 백세의 이로움 앞에 놓을 수 있겠는가?”


雍季之言, 百世之利也. 狐偃之言, 一時之務也. 焉有以一時之務先百世之利者乎.   

            

눈앞의 승부에만 집착하였다면 호언을 높이 평가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지휘관이나 수장들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급급하고, 실제로 논공행상을 할 때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에게 가장 큰 상을 내리게 마련이다. 진문공은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실제 전투 상황에서도 속임수를 강조한 신하의 계책을 실행하였지만, 전후 논공행상 과정에서는 오히려 신뢰를 강조한 참모를 포상했다.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나라 간의 운명이 걸린 전쟁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일시적인 속임수가 아닌 장기적인 계책을 제시하는 신하가 있었다는 점이 놀랍다. 또 그러한 계책을 높이 평가한 진문공도 대단하다.



더욱이 실전에선 속임수를 강조한 신하의 계책에 따라 전쟁에 승리하였지만, 논공행상에선 속임수가 아닌 장기적인 계책, 어쩌면 비현실적인 그 방안을 제시한 신하의 포상 등급을 높였으니 진정 진문공답다. 진문공 중이가 탁월한 역량, 뛰어난 정세 파악 능력, 훌륭한 인품 등을 소유하였기에 참모들이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도 오랜 세월 변치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 참모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함께 충심 어린 간언이 있었고, 참모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한 진문공이었기에 19년 천하를 방랑한 뒤 극적으로 집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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