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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21. 2023

나이가 들면 모른 척 하기
별일 없제?

큰아들이 밤늦게 들어와도  

요즘 큰아들 귀가 시간이 들쑥날쑥합니다. 어제 밤엔 밤11시가 되어도 카톡 문자도 없고 전화 연락도 없어서 저녁 내내 큰아들 연락을 기다렸습니다. 늦게 귀가할 때는 꼭 문자를 남기는 큰아들인데 연락이 전혀 없어 걱정이 되기 했지만 별일 없을 것이란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직장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든지 여자 친구를 만나 데이트를 할 때 제가 전화를 걸면 그것도 궁색할 것 같아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시내 남포동에서 들어오는 마지막 시내버스가 밤 12시 30분 경에 있어서 그때까지 기다리려고 잠깐 침대에 누웠는데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큰아들 방으로 조바심내며 가봅니다.


현관문 앞에 구두가 보이니 집에 온 것은 같은데, 그래도 작게 노크를 하면서 살며시 문을 열었더니 큰아들 아주 깊이 잠들고 있었습니다. 깊이 잠든 것 같아 깨우지는 못하고 문을 닫고 다시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옵니다. 제가 어제 밤에 먼저 잠들고 큰아들은 뒤에 마지막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왔을 테지요.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저와 아내에게 집에 돌아왔노라고 인사를 하려 하지만 둘은 이미 잠들었으니 어쩔 수 없이 제 방에 돌아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로 들어갔겠지요. 평소에 부모의 마음을 워낙 잘 헤아려 주는 큰아들이라 믿지만 그래도 밤늦게 연락도 없이 오지 않으면 아버지로서 걱정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부엌 싱크대로 와서 며칠 전 아파트 같은 라인 주민께서 주신 마늘을 물에 불려 까기 시작합니다. 우리집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딸 아이가 씻고 나와서 인사를 합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이신 그 주민께서 저를 생각하여 이렇게 귀한 마늘을 가져와 현관문 밖에 손잡이에 걸어놓았네요. 일전에도 가지, 오이, 상추 등을 현관문 밖 손잡이에 둔 적이 있어서 당연히 그댁인 줄 알았지요. 확인 겸 안부인사차 전화를 드렸더니 맞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귀한 것 고맙게 잘 먹겠노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댁 부부와 저는 특별한 인연이 없는데, 이렇게 싱싱한 채소 등을 가져다 주는 이유 궁금하지요. 재작년 봄 무렵에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당시는 현직에 있을 때라 그날 퇴근하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정장을 한 채 유모차에 짐을 싣고 유모차를 통째로 들고 택시 트렁크에 실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할머니는 꼭 부축하여 택시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저로선 당연히 해야할 바를 한 것뿐인데 그 할머니께선 너무 고마웠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사위가 부산대학교 교수님이라고 자랑하시더군요. 이렇게 많은 짐을 지고 택시를 타고 가시면 내릴 때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여쭈었더니 택시가 도착하는 즈음에 딸과 사위가 마중 나오기로 하였다고 해서 제가 안심했지요.


그후 시골에서 생산한 채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갖다주십니다. 제가 그만 받겠다고 사양하니까 이젠 아예 현관문 밖에 걸어두십니다. 그리고 급하면 저를 부르십니다 . 그러면 아내가 놀립니다.


"괜히 공짜로 받다가 당신 이제 코 끼있다. 앞으로 우짜노. 우리 000씨. ㅋㅋ"

라면서 말이지요. 실제로 노부부 둘이서 살다 보니 이런 저런 급하게 손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달에는 작은 방 침대를 못 옮겨서 급하게 전화가 와서 가보니 작은 침대를 방향을 다가 구석에 꼭 끼여 있더군요. 그걸 통째로 옮기려니 힘도 들고 사이즈도 안 맞아 각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어가 침대를 몇 조각으로 분리하니 간단하게 해결되었습니다. 두 부부 신기해 하면서 박수를 치며 감사 인사를 연신 합니다. 저에게도 이런 재주가 다 있네요. 그날은 물 한 그릇 얻어 마시고 내려 왔습니다.


그렇게 긴 긴 사연 후에 받은 마늘을 열심히 깝니다. 품질도 꽤 좋으네요. 저를 생각해서 골라왔다고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마늘 까는 것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성가십니다. 그래도 고마운 마음에 기꺼이 마늘을 열심히 까고 있는데, 큰아들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야~야, 큰아들 00아 어제 별일 없제. 우리가 먼저 자 버렸네."


"아버지 어제 연락도 못 드리고 늦게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걱정 많이 하셨지요."


"아이다. 괜찮다. 큰아들이 별일 없으마 됐다. 아침은 꼭 챙겨 먹고 가야한데이. 알았제."


큰아들이 샤워하러 들어가니 이젠 아내가 눈을 어렵게 뜨면서 밖으로 나옵니다. 주부가 확실하게 바뀐 것 같습니다. ㅎㅎ. 30대 중반의 아들이 밤늦게 들어온다고 뭐라 소리칠 수도 없고 소리칠 생각도 아예 없었습니다. 단지 별일이 없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마늘만 까고 있으니 큰아들 괜히  미안해 합니다. 그래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긴 긴 인생 중에 20대 30대 결혼 전에 저렇게 밤늦게까지 쏘다니면서 술을 마실 수 있지, 결혼 하고 나이 들면 저런 시간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안 다치고 별일만 없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3남매 예정보다 늦게 오거가 하면


"야~야, 별일 없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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