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Jun 30. 2023

그놈 정체성부터 파악해 봐

딸 아이가 지난 주 아침 일찍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몸이 좀 불편하면 제가 가끔 차로 태워주는데 그날은 딸 아이가 아침 일찍 나서서 시내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집에서 근무지까지 3~40분 정도 걸리는 출근길이고 한번에 도착하기 때문에 시내버스로 가는 것도 괜찮다면서 저에게 가급적 신세를 지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매일 딸 아이를 태워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딸 아이를 태워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의 긴급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딸 아이 출근을 돕고자 차를 운행했을 때 몸이 매우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제가 어디 외출하거나 누군가의 약속 때문에 집을 비우면 그때부터 불안심리가 몰려온다고 솔직하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웬만하면 제가 집을 비우지 않겠노라고 약속했지요. 어쩌다 집을 비울 일이 있으면 3남매 중 최소한 한 명은 아내를 지키게 하고 집을 나서지요. 


며칠 전에 딸아이 출근길에서 바로 옆에 앉은 전혀 모르는 남성이 내리면서 주뼛주뼛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더랍니다. 혹시 전화번호 좀 알 수 있나하면서 말이지요. 너무 진지하게 말하기에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우리집 근처 찻집에서 만났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주부터 어제 저녁까지 약 1주일 가량 우리 가족에겐 톱뉴스였지요. 큰아들이 왜 길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전화번호를 알려주냐고 살짝 질타도 하고, 아내는 그 남자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더나, 얼굴은 잘 생겼고, 등등 많이 물어봅니다. 딸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도 그 사람이 하도 진지하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기에 만약 제가 거부하면 그 사람 입장이 뭐가 되냐 싶어서 알려 줬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그래도 낯선 사람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전화 번호를 알려달라고 한다 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곤란할까를 고려하다 정작 세상에서 제일 귀한 우리딸이 곤란에 빠질까 봐 오빠하고 엄마가 걱정하는 것 아닐까 싶어. 다음엔 그런 식으로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 남자분이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아 알려줬어요."

"그래 잘 했다. 난 우리 딸의 판단에 맡긴다. 딸 생각을 전적으로 존중하려 해. 앞으로도 많이 만나봐야 사람을 제대로 알 것 같아. 부담없이 만나면 되지 않을까."


우리 딸은 정말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순합니다. 남자를 마구잡이로 만나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냥 조신합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딸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렇게 전화번호까지 용기를 냈을까 궁금했지요. 첫 만남 잘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신신당부합니다.


"니 있제, 내가 동생을 잘 안다. 니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진짜 순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난 남자들이 '보험' 따위 말을 꺼내면 절대 동의하면 안 된다. 겉만 멀쩡하이 해가지고 니 같이 순진한 여자에게 그런 잘못된 짓을 하는 놈이 많으니 진짜 조심해야 한데이.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내면 곤란하다. 그리고 오늘같이 날씨가 이렇게 안 좋은 날 왜 꼭 만나야 하노. 다음 날 좋을 때 다시 약속 잡으면 안 되나."


그러자 딸 아이가 말합니다. 자기도 약속 날짜를 바꾸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쪽 남자가 반드시 약속한 날 만나고 싶다고 간청하더랍니다. 그래서 어제 만나러 간 모양입니다. 경기도에 혼자 사는 막내아들에게도 소식이 간 모양입니다. 다음에 부산 내려오면 그 남자 정체를 확인하겠다면서 누나보고 조심 조심해서 만나고 와야 한다고 했답니다. ㅎㅎ.


딸 아이가 그 남자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는데 키가 상당히 크고 미남형 얼굴입니다. 복싱 운동을 하는 사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상세한 프로필은 잘 모른답니다. 어쨌던 어제 밤에 만났습니다. 저녁 7시에 만나러 나간 딸 아이가 9시가 되어 가도 연락이 없습니다. 아내는 덜컥 걱정이 되는가 봅니다. 정작 저는 걱정이 별로 되지 않았습니다. 딸 아이 삶에서 처음으로 이성을 만나는 자리에서 아무리 순진하다 해도 그래도 30대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했지요. 아내가 전화를 한번 걸어볼까 하기에 처음엔 말렸는데 두 번째 물어오기에 그러면 걱정도 되니 해 보라고 했지요.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면서 갑자기 아내가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저도 솔직히 시간이 지나가면서 조금 걱정은 되긴 했지요. 그런데 밤 9시 조금 넘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실에 저와 아내와 큰아들 다 모입니다. 딸 아이의 반응이 궁금했지요. 


"키 183에 얼굴도 미남이던데, 잘 생겨서 괜찮던데."


아내는 그게 전부야 하는 표정입니다. 딸 아이의 표정은 그냥 싱글벙글합니다. 대학에서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체육 관련 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최근에는 영화 연기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린 버젓한 직장도 있고 지금 그 나이에 자동차 운전도 하면서 어느 정도 가솔을 책임지는 남자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순진한 딸 아이는 그 남자의 외모에 완전히 빠진 것 같습니다. 


아내가 한 마디 합니다. 


"능력도 없이 겉만 멀쩡하면 나중에 여자들 고생 진짜 마이 시킬 텐데. 30대 중반의 남성이 지금도 시내버스를 타고 타니고 직장도 확실하지 않으면 곤란한데, 우짜지. 다른 남자도 만나 봐라."


아내 실망한 표정 역력합니다. 하지만 딸 아이는 전혀 다릅니다. 그냥 신이 났습니다. 난생 처음 마음에 든 남자를 만난 덕에 엄마의 걱정 섞인 말은 외면해 버립니다. 그리고 저에게 와서 말합니다. 


"그 남자 알고 보니 아빠가 근무한 학교 졸업생이던데요. 그런데 아빠한테 배우지 않아서 그도 아빠를 잘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 내가 30여 년 근문한 학교에서 나를 잘 모르면 그 아~ 간첩이다. ㅎㅎ"


딸 아이가 씻으러 들어가고 아내는 제 곁에 와서 걱정어린 말을 계속합니다. 능력도 없는 남자 만나 우리 딸 저 순진한 딸 고생 죽도록 하는 거 아니겠냐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인자 처음 만났는데 뭐 그리 조급하노, 딸 아이가 현명하니 그냥 지켜만 보자. 아이의 판단이 중요한 거 아니겠나. 그 머스마가 우리랑 만나는 것도 아닌데 왜 부모가 너무 걱정할 필요가 있겠나. 당신 생각도 일리가 있지만 이제 처음 만났으니 차차 두고 보면 알겠지. 나도 학교에 전화해서 후배들엑 그 친구 신상을 파악해 볼게. 하루 만에 알 수 있을 거야. 글마 담임이 지금도 있으니."


그렇게 저와 아내가 자못 심각하게 대화하고 있는 거를 딸아이가 보았습니다. 그래도 딸 아이의 표정은 밝습니다. 제가 딸 아이에게 말했지요. 


"우리 착하고 순진한 딸 00아 오늘 처음 만났으니 제대로 잘 알지 못할 거다. 앞으로 차차 만나면 잘 알겠지. 딸이 마음에 들어하니 나도 딸과 같은 생각이다. 잘 되었으면 좋겠구나."


딸도 제 말에 힘을 얻는 듯합니다. 그리고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당부합니다. 


"그나저나 다음에 만나면 그놈 정체성부터 제대로 파악해 봐."   

작가의 이전글 문제 해결 이렇게 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