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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01. 2023

그대 혹시 와 있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강변 둑길을 걸어갑니다. 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다가 가끔은 이렇게 현실도피처럼 이곳의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지난 삶을 돌아봅니다. 오래 전에 우리가 어느 여름날 함께 걸었던 이 길에서 전화를 걸어주었던 사람! 서로 약속을 하지 않았기에 이곳의 시공간에서 만남은 늘 엇갈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여기에 와서 자신의 방문을 알려주면 또 한 사람은 그 시간에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주고 받았지요.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또 흐르고.


열 일곱 한 번, 스물 두 살 군입대 때 한 번 그리고 거짓말처럼 운명 같이 마흔 일곱 살 때 고향 마을 친구 부친이 위독하여 저를 급히 찾았을 때 시골 그곳을 찾아가다 스치듯 길에서 만났으니 긴 긴 인생 중에 딱 세 번 얼굴을 보았지요. 그렇다고 막 그렇게 애틋한 것도 아니고, 추억에 젖어 현실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눈앞을 지나가는 삶 속의 몇 컷 사진 같이 담담한 만남처럼 묽어져 갑니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을 살아가는가 봅니다. 


이젠 혼자 앉아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강변 둑길을 천천히 걷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름 모를 풀잎들이 올려다 보던 그때처럼 세상의 풍경들이 온통 녹색 향연으로 짙은 향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전에 여기에 있었던 허름한 식당 평상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서녘 봉화산을 빗겨 온 세상을 발갛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다, 강물 위로 솟구쳐 오르던 잉어떼를 보면서 그만 둘이 동시에 감탄했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하늘색 머플러로 이쁘게 묶은 채 착하고 순순한 미소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강마을 저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그 소녀도 생각납니다. 고향 마을을 찾을 때마다 향수를 달래주려 저와 함께 일부러 걸어주었던 벗들의 순박한 얼굴도 생각납니다. 추억 속의 시간 조각마다 석양빛이 곱게 곱게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간 자리에 다시 돌아와 홀로 걸으면서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둑길 곁에 말없이 서 있는 수양버들 가지 가지에서 찾아봅니다. 이 길을 헤아릴 수 없이 걷고 또 걸었던 그 시절 그 사람들의 발자욱 대신에 잎새가 넓은 질경이 풀들이 석양빛을 받아 이젤에 얹힌 한 편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살짝 뻗어 질경이 잎들에서 고향, 추억, 그리움 등의 단어를 떠올립니다. 저처럼 그 사람도 불현듯 추억을 찾아 이곳에 오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살며시 생겨납니다. 전혀 낯선 젊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건네는 밝은 인사 속에서 아득한 그 시절 들판을 향해 소달구지에 풀을 가득 싣고 가며 인생의 온갖 경험을 얼굴로 보이듯 반겨주던 아재들을 떠올립니다. 


여름 날 낭만처럼 보이는 수박 밭에 넣을 퇴비를 뿌리는 스무 살 저를 떠올립니다. 왼쪽 어깨에 색이 너무 바랜 옥양목을 두껍게 꼬아 걸고 왼손으로는 삼태기를 잡은 채 오른 손으로 퇴비를 부지런히 퍼내면서 바쁘게 걸어가던 스무 살 저를 밭 한 쪽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그녀도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거름을 열심히 뿌리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귓가가 그냥 달아올랐던 것도 청춘의 의미겠지요. 열 일곱 고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하고 많은 장소도 많은데 낙동강변 수박밭에서 그야말로 눈이 맞았던 일들이 이젠 흘러간 소설의 서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지면 강변 둑길엔 사람들 발길도 사라지겠지요. 음력 오월 열 나흘 달이 뜬다면 거의 보름달이 될 테고, 이젠 세상에서 모두 사라진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며 둑길을 떠나 고향마을로 돌아가야겠지요. 진짜 몇 안 남은 고향 마을 형님들과 둘러앉아 지난 추억을 생각하며 민물 매운탕을 앞에 놓고 술이라도 한 잔 하겠지요. 시골 마을의 시간은 대부분 멈춰 버려 '정지(停止)' 되는데 오늘은 제가 오랜만에 왔다고 마을 회관에 불을 밝힐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새 시골 향기에 취해 깊은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새벽 서늘한 기운 속에 길다랗게 늘어진 들길을 따라 다시 이곳까지 왔을 때 수양버들 사이로 부드럽게 퍼져나오는 물빛 안개를 지나 고운 미소 띤 동그란 얼굴로 혹시나 나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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