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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06. 2023

숲길을 지나 강물을 바라보다

녹색 향기가 진하게 숲속을 맴돌다 슬며시 강물 위로 걸어갑니다. 아득한 어린 시절에도 저 향기는 제 몸에 다가왔고, 그 속에서 우린 삶의 편린들을 하나씩 키워나갔습니다. 그 조각 조각 모두가 인생에서 하늘빛으로 채색되었고, 온갖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인 세월을 세상 속에서 새로이 만들어 나갔습니다. 돌아보면 인생 그 어느 순간이라도 소중한 시간이 아닌 적이 없건만 후회하는 마음이 참으로 크기만 합니다. 


전혀 예상치 않게 바쁜 일상을 다시 맞이하니 마음은 왕성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데, 몸은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그라집니다. 가끔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을 벗어나 고즈넉한 자연 숲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편안히 누워 나무 가지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하늘빛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정겹게 느껴지고, 부드럽게 굽이쳐 흘러가는 강물 풍경을 발베개하고 기댄 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상 욕심을 벗어버린 것은 참으로 잘한 것 같습니다. 숲속을 지나 강물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면 어느 새 모래 사장으로 접어듭니다. 그 많은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 마음껏 뛰어다녔던 드넓은 그곳에 세월의 깊이를 가득 품은 수양버들 행렬만 말없이 서서 우리를 바라봅니다. 하늘로 하늘로 오르려는 기둥에 기댄 수양버들 가지는 하염없이 아래로 내려갑니다. 가끔은 청량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수양버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숲속의 저 많은 생명체들은 언제 어디서 이곳에 와 자리를 잡았을까. 호기심이 그냥 쏟아집니다. 나이가 들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지요. 


숲이 끝날 무렵 저 멀리 강마을 고운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린 시절 강마을에 누가 살고 있을까 혼자 많이 물어보기도 했지요. 한번은 강마을에 누가 사는지 궁금해서 멀리 돌아서 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도 강변 둑길이 제법 크고도 길었습니다. 그 마을에 들어서니 역시 우리 마을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강물 너머에서 보는 풍경은 얼마나 신기했는지요. 그 마을 첫집 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긴 둑을 걸었습니다. 소들은 제 마음대로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새하얀 블라우스에 분홍빛 스웨터를 입은 여학생과 남학생 둘 그렇게 셋이서 둘러앉아 정답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말 부러웠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고왔던 여학생의 입성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제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하얀 블라우스와 분홍빛 스웨터를 입은 여학생에게 눈길이 많이 간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물론 강마을에서 본 그 여학생이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닐 리가 없었지요. 그곳은 저의 고향 달성군 논공면 위천이 아니라 고령군 성산면 삼대였기에 우주가 한번 바뀌기 전에는 만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곳 출신 지인과 대구에서 대화를 하는 도중에 그 여학생이 대충 누구인지는 알 수는 있었지요. 거기까지만이었습니다. 이렇게 숲길을 걸어가니 별의별 생각이 다 나네요. 그래도 회상 중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기억만 떠오르는 그건 참으로 다행입니다. 


가까운 날 중에 여름비가 그림처럼 내리는 날이 있으면 혼자서 여유를 부리며 이곳에 오려 합니다. 어쩌면 하루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고, 가지고 온 책을 벗삼아 밤새 문을 열어놓고 밤비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름한 숙박지에서 그것도 어린 시절 추억의 공간과 너무나 흡사한 강변 시골 마을에 손님이 별로 없는 숙소를 찾아 혼자서 낭만에 젖어 보려합니다. 책을 보다 글을 쓰고 가끔은 캄캄한 바깥의 여름비를 구경하다 자신도 모르게 잠드는 순간을 그려 봅니다. 이젠 남들 모르는 시골에 들어가 조용히 은거하는 꿈을 많이 꿉니다. 도시의 일상에서 바쁘게 살아갈수록 마음 한 켠에선 유년의 기억이 새록 새록 솟아올라 참으로 고요한 그곳을 꿈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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