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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16. 2023

<소설  "엄마의 노래" 중에서>

도시에서 온 소녀가 보름달 같았다

도시 소녀    


가끔 책을 읽다 말고 생각에 잠긴다. 그 생각은 지난 날 삶 중에 어느 시절이든 자유롭게 날아간다. 산을 두어 개 넘어 나뭇집을 지게에 가득 지고 넘던 고개. 무덤 위에 쉐이코 독수리 카세트를 놓고 빙 둘러 앉아 들었던 팝송들. 유년 시절 그렇게 즐겁게 뛰놀던 앞 동산,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마을이라 저녁밥을 먹고 나면 그 순간부터 너무나 풍요로운 자유시간었다. 마을 가운데쯤에 있던 넓은 마당에는 저녁마다 4~50명이 모여 놀았다. 백구마당이라 했던가. ’달구피시‘라고도 하던 유사 닭싸움, 기마전, 동네숨바꼭질, 비사치기, 여자애들만 하던 공기놀이 등등 정말 시끌벅적했다.  

         

보름달이 뜬 날에는 온 마을 아이들이 그냥 쏟아져 나왔다. 그 넓은 마당에 가득한 아이들 주위에 아재, 아지매들이 조금 높은 곳에 무리지어 앉아 우리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분들은 가끔 간식거리를 가지고 나와 함께 먹으면서 담소를 즐기곤 하였다. 다들 얼굴엔 미소 가득하니 참으로 평화롭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게도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몰려 놀아도 크게 다툰 적이 없었다. 다들 참으로 순하고 사이가 좋았다. 대부분 집안 친척이라 그랬는지 모른다. 외지에서  아이들도 모난 경우가 별로 없었다. 보름달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치고 아이들은 저리 재미있게 떠들썩하니 뛰놀고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게 그림처럼 떠올라온다. 그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동네 한마당에서 모여 밤을 함께 보낸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좋았는데.       

   

초등학교 그러니까 지금은 사라진 국민학교 5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한 살 어린 후배 성희 집에 놀러온 여자아이가 우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도시에서 사촌인 성희네 집에 잠깐 온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정말 예뻤다. 평소에 보던 우리 동네 아이들과 입성부터 달랐다. 전형적인 공주 차림새였다. 하얀 블라우스에 분홍색 세터 그리고 하얀 양말에 깨끗한 구두까지 정말 너무나 달랐다. 그리고 커다란 두 눈망울에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예쁜 동그란 얼굴이어서 단번에 우리들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두들 그날은 그 아이 얼굴만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뭐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얼굴만 보는데도 그 아이가 제 사촌 성희 뒤로 자꾸만 피하는 모습도 너무 예뻤다.      


그날 그 아이를 본 우리 동리 남자애들 모두의 가슴 속은 그냥 굳어버렸다. 그 아이는 별말도 없이 그냥 미소만 지으면서 평상 한쪽에 앉아 우리들이 노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평소와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 비사치기를 하는데 몸동작도 커지고, 닭싸움할 때는 유난히 거세게 몰아쳐 부딪친다. 기마전 기수는 위에 올라타서 떨어질 위험이 커서 다들 피하는데, 그날만은 서로 기수를 하려고 다투는 상황이 여기저기서 발생하였다. 평소와 달리 아이들의 목소리가 몇 갑절이나 커졌다. 그러다가 연신 그 소녀를 흘끔 흘끔 쳐다보고. 또 보고.   

        


그중에 누군가 그 소녀에게 다가가 말이라도 걸면, 정말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예쁘게 답을 하는데,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따로 없었다. 우리 마을엔 그렇게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예쁜 아이가 전혀 불가능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모습이 더욱 예뻤다. 나도 그쪽으로 가서 말이라도 건네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 하였다. 내 쪽으로는 한번이라도 좋으니 눈길을 주었으면 좋으련만, 끝까지 한번도 안 봐주니 서운하기도 하였다. 하기야 그 많은 아이들 얼굴을 언제 다 돌아본단 말인가. 그 소녀의 환하고 밝은 미소가 하늘에 뜬 보름달 마냥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 소녀는 미소를 띤 채 평상에서 일어나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 동네 여자 아이들이 우리 머시마들보다 그 소녀와 말을 하고 싶어 더욱 안달이 났다. 그것이 참으로 신기하였다. 결국 그 소녀의 음성은 거의 못 듣고 멀찌감치에서 보름달과 함께 피어오른 미소만 기억에 가득 남았다. 그 누구도 그 소녀에게 잘 가라는 말도 않고 각자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들 모두에게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달빛이 보드라운 손길로 이끌어 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피곤하여 그냥 잠에 떨어졌다. 씻고 자라는 엄마의 말을 귓가로 흘리고 그냥 꿈속으로 빠져버렸다. 엄마는 나에게 '공부'란 말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하고 밤늦게 놀다 와도 어디 다친 데는 없나 정도만 물었을 뿐이었다. 다른 때라면 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돌아와도 꼭 책을 읽고 잠자곤 했는데, 그날은 왠지 피곤기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에 가방을 챙기고 학교를 가기 위해 집에서 나와 동구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 새벽에 그 소녀도 걸어가고 있었다. 사촌 성희랑 다정하게 걸어가는데 새벽길이 갑자기 환해졌다. 동구 밖 길에 무슨 꽃이라도 핀 양 갑자기 화려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성희가 갑자기 밀을 걸어왔다.  

    

“정인아, 니 지금 벌써 학교 가나? 이 시간에.”     

“오늘 샘께서 쪼끔 빨리 오라 캤다. 쫌 있으마 대회가 있는데, 학교 대표로 나간다. 그래서 그 대회에 나갈 사람 미리 와서 학교서 며칠 간이라도 미리 책도 읽으면서 준비하라 카셨다. 근데 니는 이 시간에 와 학교 빨리 가는데? 먼 일 있나?”     


“난 아이다. 우리 사촌하고 대구 갔다 와야 한다. 난 오늘 학교 안 간다. 송희야 인사해라. 어제 밤에 밨제? 정인이는 우리보다 한 살 우지만 한 동네서 그냥 친구처럼 지낸다. 송희야 알겠제. 그라고 정인이는 공부 진짜 잘 한데이. 우리 학교는 매달 월례고사 치기만 하믄 전체 조회 자리에서 우등상을 받는데, 우리 마을엔 정이이밖에 없다. 아지매가 동네 방네 자랑을 하도 해가 우리도 클 때부터 마이 들었다 아이가. 송희야 인사해라. 또 언제 볼낀지 모리는데.”          


갑자기 쑥스럽다. 공부 잘 하는 아~가 어디 한둘인가. 성희가 제 사촌을 소개하면서 인사하라고 했지만 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소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냥 고개만 까딱 눈인사를 보내왔다. 난 순간적으로 가슴이 멎었다. 갑자기 구름이라도 밟고 둥둥 떠다니는 심정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예쁜 아이랑 인사를 나누다니. 나도 어설프게 고개만 까딱하고 먼산을 보면서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 책보자기를 등뒤로 돌려 X자로 더욱 세게 묶은 다음에 학교로 걷기 시작했다. 성희와 송희도 저들끼리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지 깔깔거리고 있다. 그들을 뒤로 하고 학교까지 3km여 거리를 바쁘게 걸어야만 했다. 그날 따라 학교 가는 길이 왜 그리 짧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머리 속엔 온통 그 소녀, 그 아이, 송희 생각만 가득했다. 하얀 브라우스에 분홍빛 세타 그리고 깨끗한 양말에 구도와 환한 미소 가득한 예쁜 얼굴만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수업 시간에 온통 그 아이 이름 세 글자만 맴돌았다. 공책에도 책에도 그 세 글자와 예쁜 모습만 뱅뱅 돌아 선생님 말씀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내가 이상한지 자꾸만 쳐다보신다.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내 자리로 와서 공책과 책을 확인하시다가,      


“정인아. 정송희가 누고, 니 지금 정신 어디 갖다 놓고 이러 얼빠져 있노. 야 일마야 정신 차리래이. 정인아 학교 대표로 대회 갈 놈이 지금 이케가 될 일이가. 일마야.”     


문제는 선생님이 그렇게 주의를 주는데도 내가 전혀 반응하지 않은 데 있었다. 급기야 수업하시는 선생님이 나를 벌을 세우기까지 했다. 평소에 어려운 가정인데도 열심히 공부하고 효성이 지극하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으니 나를 혼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교실에서는 그냥 주의를 주시기만 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가서 회초리로 서너 대를 맞았다.

          

그런데 난 그 회초리가 아프지가 않았다. 선생님께서 뭔가 화를 내어 큰소리치신 것 같은데 난 당시 누구에게 매를 맞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선생님의 호통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회초리로 맞는 와중에도 정송희 그 아이 얼굴만 생각했다. 아침에 나에게 보내 준 화사한 미소 그리고 예쁜 얼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3km 여 시골길을 걸어오면서도 그 아이 이름만 입에서 중얼중얼대고 집에 와선 책상 위에도 공책에도 온통 정송희 이름과 얼굴 캐리커쳐만 가득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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