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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16. 2023

호박죽 한 그릇 하시러 오시이소

일요일 하루 종일 비가 많이도 내립니다. 다음 달 출간 예정 원고 수정 작업하려고 전체를 프린티해서 집에 가져와 마지막으로 오,탈자 확인도 하고 문맥도 다시 살피는 작업 중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오늘 일요일 밤까지 마무리지으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지네요. 마침 경기도에서 혼자 생활하는 막내가 내려와 이틀 머무르고 올라가면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고는 오늘 못 하면 내일 또 하지 뭐 하면서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말이지요. 간간이 유튜브 동영상이나 관련 자료, 논문 등을 확인해 봅니다.


점심 먹고 조금 졸릴 시간에 낯선 전화번호가 뜹니다. 전화를 받으면서,


"예, 000입니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선생님 일요일 오후에 댁에 계신능교? 우리 노인정에 호박죽을 끓여 났는데, 좀 와서 안 드실랑교. 호박죽 한 그릇 하시러 오시이소."


"혹시 누구신지요? 제 전화 번호는 어찌 아셨을까요?"


전화기에 들리는 음성을 추측해 보니 80대 할머니 같습니다. 동대표자회의 멤버들 전화번호 중에 제 것만 저장해 두었다고 하십니다. 비상 시에 연락처가 필요해서 그렇게 해두었는데, 굳이 저만 그렇게 연락하시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아이고, 우리 노인정에 그래도 한번이라도 들다 보시는 분은 선생님밖에 어디 있능교? 오실 때마다 아이스크림이다 묵을 꺼 마이 사갖고 오시이 우리가 딱 미안해 안 되겠데예. 그래서 오늘 이렇게 우리가 준비했으니 오이소. 그라고 사모님 드실 거 한 그릇 싸가지고 가시야 합니데이. 그라고 선생님 뭐 하나 가르쳐 주이소. 딴 기 아이고 카톡 문자가 길게 온 거 다른 사람한테 전달하는 방법을 모르겠네예. 오시면 꼭 갈차주이소. 얼른 오이소."


그렇게 오랜만에 아파트 노인정에 들렀습니다. 도시 아파트 노인정에도 사람 발길이 뜸합니다. 오늘같이 비라도 내리면 더 더욱 사람들이 오시지 않지요. 가기 전에 인근 마트에 가서 연로하신 분들 드실 것으로 '연양갱' 세트를 여럿 샀습니다. 시골 제 고향 마을에 갈 때 연양갱 한 박스를 포함하여 생선회나 음료수 등을 가지고 가면 아지매들, 형수님들이 정말 좋아하시기에 여기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노인정 문을 열고 들어서니 호박죽 내음새가 진하게 풍겨나옵니다. 정성껏 한 그릇 담아 주십니다. 큰 목소리로 환영해주시는데, 특히 95세 할머니는 두 팔을 높이 들고 마구 흔들며 어린아이같이 좋아하십니다. 본인이 나이를 밝히지 않으면 도저히 알아챌 수 없도록 진짜 건강하십니다. 이렇게 나이 많으신 분들이 모여 있을 때 한 분 한 분 모두 정성을 들여 인사해야 합니다. 어느 분이 제 손이라도 잡으면 그에 그치지 말고 모두 잡아 드려야 합니다. 혹시라도 손을 잡지 않고 지나가 버린 분이 계시면 매우 서운해 하시거든요. 그건 할머니 할아버지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호박죽을 먹기 전에 먼저 카톡 문자 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립니다. 한번 가르쳐 드려도 고개를 갸우뚱하십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실습하시니까 그제서야 이젠 할 수 있다고 환하게 웃으십니다. 또 다른 말씀이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95세 할머니께서 제게로 다가와


"우리집에 어제 전기가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나선 테레비가 안 나와요. 우리 집에 가서 한 번 봐줄 수 있나요? 토요일, 일요일 하루 종일 답답해 죽겠네요. 우짜믄 되겠능교?"


"아이고, 전기는 제가 할 수 없어요. 내일 월요일에 아파트 관리소 시설주임이 출근하면 바로 가서 고쳐 줄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으면 바로 고쳐드릴 낀데 조금만 참으세요."


그렇게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제 그릇엔 호박죽이 정말 가득 담았네요. 물김치랑 배추 김치랑 함께 먹으라고 내놓았습니다. 좀전에 우리집 아이들과 점심 식사를 한 터라 조금만 먹겠다고 말했는데도 이렇게 많이 담아 먹으라고 권하네요. 참 오랜만에 먹어 보니 호박죽이 진짜 맛있었습니다. 매일 점심을 자기들끼리 먹다가 오늘 같이 먹어 줘서 진짜 고맙다고 하십니다. 나이가 드니 몸도 아프고, 어디 갈 데도 없고, 가족들도 내 몰라라 하고 등등 하소연, 넋두리를 가득 가득 털어놓습니다.


노인정 창문을 타고 내리는 여름비를 함께 바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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