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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22. 2023

깊은 밤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 7월 20일 목요일 밤 무작정 차를 끌고 이곳 시골 고향 마을에 왔습니다. 밤늦게 도착한 시골 마을 참으로 정적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젊은 날 추억에 젖어 아무도 없는 밤길을 혼자 걸어봅니다. 유월 초 사흘이니 달이 있어봤자 흔적이나 있을까 싶습니다. 가끔 고향 마을을 찾아오면 옛날 추억에 깊이 빠진 형님들이 저를 반겨주긴 하였지만 오늘 밤은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정말 조용한 밤길입니다. 어린 시절 추억에 젖어 우리 고향 마을 달성군 논공면 위천1동 우나리 백구마당을 지나갑니다. 이곳에서 함께 놀았던 그 시절 그 때를 떠올립니다. 여기서 조금만 걸으면 상원 형님 대문을 비스듬히 올라갑니다. 원덕이 형, 그리고 낯선 곳에서 이사 온 사람의 집이 저를 반겨 줍니다. 조금만 지나치면 영란 누나 대문이 아직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참으로 착했던 영란 누나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돌아서면 길수 집이 보입니다. 길수 아버지께선 참으로 의리갚은 남자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남자는 '으리'라시던 그 형님께서 저녁 밥을 먹고 곧장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와 술을 한 잔 하시면서 저를 유난히 이뻐해 주셨던 그 형님 그냥 그립습니다. 이렇게 밤길을 걸으며 추억에 젖어봅니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이곳 고향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으면 좋겠지만 이밤을 타서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위천 마을에서 함께 자란 우리 동리 사람들은 제가 지금 무엇을 말해도 잘 알겠지요 그렇게 골목길을 빠져 나오면 우리 마을에서 제일 예뻤던 영애 영미 자매 집이 보입니다. 당시 시골 마을에서 참으로 드문 커트 형의 영애는 정말 인기가 많았지요. 영애 그 애가 지나가면 마을 머스마들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니다. 마을 전체가 난리였지요. 그 아이가 한 번 웃으면 그냥 세상이 환했지요. 물론 저와는 상관이 없었지만.


퇴직하면 고향 마을에 돌아와서 그 옛날처럼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시던 형님들 형수님들이 이젠 8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무등도 태워주고 소등에 올려 놓고 집으로 돌아가던 형님들의 따스한 미소도 떠오릅니다. 냇물을 틀어막고 경운기로 막힌 물을 오전 내내 퍼내면서 막걸리 심부름을 저에게 하게 했던 우리 동네 형님들 어디 계신가요. 그렇게 틀어막은 냇물을 몽땅 퍼낸 뒤 바닥에 파닥대는 물고기들을 그냥 쓸어담았지요. 작은 것은 다시 물로 보내고 큰 것만 골라서 매운탕을 끓였습니다. 한없이 행복했던 그 시절 추억의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여름날 마당늪에서 단체로 수영하던 때도 선명하게 떠오르네요. 늪이라곤 하지만 호소(湖沼)라고 할까요. 저지대에 물이고여 헤엄치기에 딱 적당했지요. 지금 제가 여기 왔는데, 그 옛날 추억처럼 우리 마을 위천 우나리 동구밖 모티에 나와 저를 안아 줄 듯한 우리 동리 형님들의 착한 그 얼굴이 참으로 그립기만 한데 지금 제 혼자 여기 시골 골목길을 걸으면서 추억을 떠올립니다. 너무나  그리운 우리 마을 추억의 시공간입니다.


동네 숨바꼭질한다고 전기도 없는 보름달 밤에 온동네를 싸돌아 다니며 깊어가는 밤을 잡아 끌었던 그 동무들의 선한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네요. 그땐 친구보다 동무란 말을 많이 썼지요. 유명한 잡지 <어깨동무>처럼.  마을 입구에 있던 막걸리집은 그냥 뜯어져 나가 버리고 바위만 남았습니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 그 너럭바위에 걸터 앉아 지나가는 버스를 모두 확인하며 저를 기다리던 우리 어머니 살아 생전 모습이 여기에 앉아 계시는 듯합니다. 추억에 젖어 널찍한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아 봅니다. 이 밤 추억에 여기까지 왔지만 다시 밤을 달려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길게 난 길을 방사형으로 걸어갑니다. 초사흘 달이 뜬다 한들 그냥 흔적만 남겠지요. 누구 집이든 들어가면 하루 묵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들어갈 수 없지요. 그래서 마을 회관 널짝한데 혼자 회관 현관 문을 기대고 죽 늘어지듯 앉았네요. 이 밤 행여 여기에서 잠이라도 들면 ㄴ자로 걸친 제 모습을 보면 고향 마을의 형수님들이 새벽에 기겁을 하겠지요. 저 안으로 보이는 골목길은 우리 동네 아이들과 마냥 뛰놀던 곳입니다. 참으로 그립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이곳에 와도 낯익은 얼굴은 정말 많이 사라졌네요.


"디럼, 언제든지 여~ 와서 하룻밤 자고 가소. 그래도 디럼은 우리들한테 참 싹싹하이 잘해 주어서 고맙기만 아효. 디럼 우리 언제 갈지 몰라요. 아지매가 그 나이에 세상 버릴 줄 우리가 언제 알았는교"


제 부모님이 계시지 않지만 그래도 고향 마을에 짙은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친형제만큼이나 살갑게 대해주는 동네 형님, 형수님들이 계셔서 입니다. 낯익은 문패 옆으로 오랜 세월 비바람에 무너져 내린 담장과 낡아 비틀어진 대문이 보입니다. 문패는 그대로인데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없습니다. 마당엔 풀이 저렇게 무성하게 자랐는데 사람의 손길은 흔적도 없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사라진 마당에선 풀만 해마다 자라고 또 마르고 떨어지겠지요. 다시 봄이 오면 새로인 싹을 틔울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들어선 초기에 고향 마을에 들르면 아지매들이 마을회관에 가득 앉아 계셨습니다. 어머니 살아 생전에 늘 이야기를 나누던 그 아지매들은 제 군제대 2개월을 남기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많이 울어 주셨지요. 아지매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제 손을 반갑게 잡았고, 저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이뻐해 주시던 아지매들을 한 분 한 분 안았습니다. 가지고 간 음식은 방 가운데 모아놓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제 삶에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셨지요. 그리고 한 10년 정도 지나니 순식간에 형수님들이 마을 회관에 자리잡아 어느 새 세대교체가 되었더군요. 아지매들은 제 어린 시절부터 한 동리에 계셔서 아무래도 그 뒤에 시집 오신 형수님들보다는 정이 훨씬 많았지요. 그렇다고 형수님들이 저에게 소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지매들에겐 큰절을 할 수 있었지만, 형수님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지요.


다시 밤길 고즈넉한 평화의 분위기로 잠들어가는 고향 마을을 뒤로 하고 도시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도회지의 바쁜 일상에 지치면 다시 이곳으로 와서 다시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의 평안을 찾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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