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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07. 2023

안단(安端)과 병자호란 이야기

자료 출처 "다움카페 산사모2009. 병자호란"

https://cafe.daum.net/sansamo2009 위 지도 자료 출처입니다.




한명기의 『병자호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675년(숙종1)봄, 만주 벌판을 달려온 한 사내가 압록강의 중강(中江)에 도착했다. 사내의 이름은 안단(安端), 청나라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향하던 도망자였다. 그의 역정은 기구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안단은 청군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끌려가 노비가 된다. 그리고 1644년,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자신의 주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한다. 1647년, 오매불망 고국으로 귀환을 열망하던 안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주인이 북경을 비웠던 것이다.    

            

  1673년 오삼계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남이 혼란에 빠지자, 안단의 주인은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강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주인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안단은 탈출을 감행한다. 물경 38년 만의 시도였다. 북경을 출발하여 산해관을 통과하고 심양을 거쳐 만주 벌판까지 무사히 가로질렀다. 탈출의 성공을 눈앞에 둔 안단은 의주의 조선 관리들에게 입국을 허용해 달라고 호소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행운은 안단을 외면한다. 공교롭게도 의주에는 마침 청나라 칙사들이 입국해 있었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안단의 사연을 청의 칙사들에게 알렸고, 칙사들은 안단을 묶어 중국 요동 땅의 봉황성으로 압송해 버린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끌려가면서 안단은 절규했다.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내모느냐?’고 말이다. 38년 만의 탈출을 시도했던 안단은 어찌 되었을까? 십중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의주부윤 조성보는 이 불쌍한 궁조(窮鳥)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은 다시 분열되었다. ‘중화국 명을 섬기고 오랑캐 청에게 맞서는 것’을 국시로 내세웠던 척화파와 ‘명을 위해 조선의 존망까지 걸 수는 없다’고 했던 주화파 간의 논쟁이 격렬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조선은 청의 침략을 감당할 역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병력의 수, 군사들의 훈련 상태와 전투 경험, 군량 등 군수 지원 역량, 지휘관의 작전 능력과 책임감 등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요소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청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거기에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명 또한 조선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청군의 침략에 수시로 유린되면서 자국을 지키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서로 싸우던 강국 사이에 끼인 채 자위 능력마저 없던 조선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구범진의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에도 기가 막힌 장면이 나온다.     

      


   1641년 11월 서울에 들어온 청 사신들은 자신들의 숙소인 태평관(太平館) 부근으로 조선 백관들을 집합시켰다. 영의정 이하 조선 신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 앞에는 의주부윤 황일호를 비롯하여 열한 명의 사형수들이 무릎을 꿇었다. 사형수들은 모두 명나라 선박과 밀통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청나라 통역 정명수의 지휘에 따라 처형이 집행되었다. 황일호를 비롯한 열 사람의 목이 잇따라 달아났다.                

   마지막 순서였던 상인 장우건에게는 능지처참 형이 집행되었다. 몰아치는 피바람 속에서 조선 신료들은 공포에 질렸다. 목 잘린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는 살풍경을 그대로 둔 채 정명수는 자신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라고 요구했다. 겁에 질린 조선 신료들은 황망하게 정명수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청사들은 피비린내 나는 속에서도 유유히 잔치를 받아 먹었다. 죽은 자들의 시신은 방치되었다. 청나라 사신들의 질책이 두려워 수습하려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인조와 조선 신료들을 겁박하여 길들이려는 청의 기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정명수는 조국 조선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빌붙은 조선 사람이었다. 왜 그리 독하게 조선 사람을 괴롭혔을까는 다음에 언급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나가 한번 절을 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씩 땅에 닿도록 하는 ‘삼궤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치욕을 겪었지만 청나라에 끌려가지 않고 군주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참으로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 인조와 숭명 사상에 푹 절어있던 당시 집권 세력들의 무능, 무책임 때문에 그 혹독한 고통은 오롯이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위에 언급한 여러 사례 중에서 삼학사들이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지조와 절개를 지킨 일을 후세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게 예찬한다. 정작 정책을 실행하고 권력을 행사한 인조와 집권 세력들의 책임 때문에 어리석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려는 신하들이 너무나도 억울하게 죽어갔다.

               

삼학사들은 그나마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아 영원히 살아남았을지언정, 혹독하게 고통을 겪고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간 백성들은 어찌 되는가.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농성하고 있을 때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나. 또 인조가 삼궤구고두례의 치욕을 당하던 삼전도 현장에서 낮부터 그렇게 앉아 있다가 저녁 무렵에야 청태종의 허락을 받아 도성으로 돌아올 때, 청나라 군사들에 끌려 머나먼 청의 심양으로 끌려가기 시작하던 그 수많은 민중들이 인조를 바라보며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라고 울부짖었던 원망과 분노는 또 어떠했을까.    

                 

청나라 심양까지 끌려간 여인들이 청나라 장수들의 본처들이 쏟아 붓는 뜨거운 물세례와 훗날 조국에 돌아와 환향녀(還鄕女)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았을 때 그 고통은 또 누가 보상하나. 더욱이 ‘피로인(被擄人)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친 자는 문제 삼지 않지만, 압록강을 건넌 조선으로 도망친, 주회인(走回人)은 조선 조정이 반드시 다시 붙잡아 보내야 한다’하는 약조가 있었다. 이에 오랜 세월이 걸려 그 먼 거리를 걸어 걸어 청나라를 탈출하고 조국 조선을 찾아온 우리 백성들을 조선 관리가 다시 잡아 청나라로 압송하면, 그들 대부분이 발뒤꿈치를 절단당하는 참혹한 상황까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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