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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07. 2023

아버지께서 밥을 맛있게 지으시니

우리집 아이들이 초중학교 시절이니 지금부터 한 15년 전 쯤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일본 방문이 지금까지 80회 정도 되는데, 아내가 우리 가족 전체 여행을 한번 같이 가자고 해서 일본 큐슈 지역 단체 관광 패키지 상품으로 4박 5일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비용이 정말 저렴하여 1인당 29만 9천원이었습니다. 우리집 3남매도 여행 가기 전부터 가슴이 설렜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여행을 하였는데, 자주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섯 명이 함께 갈 기회가 생각보다 잘 오지 않더군요. 대신에 큰아들과 둘이서 몇 번 다녀오거나 아내와 일본을 방문하고 온 적이 몇 차례 있었지요. 그렇게 4박 5일 여행 마지막 날 밤 호텔에서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들 방안에 모여 앉아 무슨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꼼짝도 안 하더군요. 가끔 바깥으로 나가 자판기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를 사서 먹으며 좋아하기도 했지요.


아내에게 여행 중 어떤 것이 좋았냐고 물었습니다. 가족 모두 함께 와서 좋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좋았다. 일본 사람들이 친절해서, 거리가 깨끗해서, 패키지 일정이 알차서 등등 예상답안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전연 예상하지 못한 말이 아내 입에서 나옵니다.


"있제, 이번 여행 중에 제일 좋았던 것이 뭐냐 하면 5일간 밥을 하지 않아서 제일 좋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내가 우리 결혼 후 20년 가까이 저와 아이들을 위해 하루 삼시 세끼 간식, 야식, 건강식 등을 챙긴다고 그 긴 시간 동안 단순 작업을, 너무나 따분한 일들을 반복 또 반복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행 마치고 돌아가면 이제부터 제가 밥을 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요새 밥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냐고. 그냥 쌀만 씻어 밥솥에 올려 놓으면 저절로 밥이 되는 것을.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고 직접 한번 해보라고.


그 약속을 100% 지킨 것은 아니지만 아침 잠이 없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침 밥을 지었습니다. 반찬은 아직도 영 어설픕니다. 제대로 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노력을 했습니다. 단순한 반찬은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를 썼지요. 된장국에 재료만 많이 들어가면 좋은 줄 알고 여러 가지 야채도 넣었더니 음식 궁합에 안 맞는 것이 많다고 아내가 가볍게 타박도 했던 일도 있습니다. 저야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잘 먹는 스타일이지만 아내는 조금 달랐습니다. 위장이 좋지 않아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할 때가 꽤 있었지요.


위장이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해 해독주스를 몇 년 째 만들어 내놓고 있습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해독주스를 먹은 이래 위장이 불편하단 말을 거의 하지 않더군요. 물론 아주 특이한 음식을 먹고 애를 먹은 적은 있습니다. 처음엔 흰 쌀밥만 하다가 인터넷에서 건강식에 필요한 것을 찾아 함께 넣었습니다. 신장에 좋은 팥,  단백질에 콩, 밥맛좋으라고 찹쌀도 추가하고, 흑미에 렌탈콩 그리고 요즘엔 밤도 넣어 봅니다. 우선 비주얼이 좋더군요. 아내가 이런 밥을 정말 좋아합니다. 어떨 때는 제가 끓인 국이 맛이 없다고 손도 안 대고 그대로 두었을 때는 저도 좀 서운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한번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아내가 해준 음식을 불평불만 없이 맛있게 먹었던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긴 했던가, 자신도 모르게 맛이 없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아내가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불만이 있었던 적이 없었을까 등등.


요즘엔 밥솥에 밥이 떨어지면 아이들이 저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제가 밥은 아무도 하지 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미안해 하니 제가 나서서 얼른 서둘러 밥을 지었지요. 오늘 저녁 밥은 밤도 탐스럽게 들어가 더욱 맛있게 보입니다. 큰아들이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저도 가끔 밥을 해보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 밥을 맛있게 지으시니......"


앞으로도 제가 죽 밥을 하란 뜻이지요. 아내도 말없이 동의하는 듯합니다. 우리집 가족 중엔 최근에 저만 직장이 없어 가장 한가하니, 열심히 밥이나 지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훗날 저에게 잘 해 줄 것 같아서요. 부모 자식도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흔히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부모 입장에서 자식을 잘 만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때부터 유순하면서 남매간에 우애가 깊었던 우리집 3남매를 보면서 제가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처럼 맛있고 건강한 잡곡밥을 짓게 되는가 봅니다.


퇴직한 가장이 집에서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밥을 짓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0여 년 긴 긴 세월 가족들이 있었기에 어딜 가도 외롭지 않고, 집에 들어오면 사람 사는 냄새를 마음껏 누렸으니까요. 이번 여름에 퇴직하는 동료와 통화를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서 보낼 예정이냐고 물었더니,


"며칠 뒤면 정년 퇴임식을 하는데, 이렇게 고생했다고 전화까지 주니 고맙네. 지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조금 취한 것 같다. 천천히 쉬면서 골프 같은 운동도 취미 삼아 하고 싶다. 자네는 여전히 바쁘게 잘 살고 있제."


가족들이 함께 있어서 고맙고 앞으로 같이 살아갈 수 있어서 퇴직 후 삶이 더욱 감사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엔 또 무엇을 넣어 가족들에게 맛있는 건강식 밥을 마련할까 생각해 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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