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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08. 2023

가급적 그런 말은 쓰지 마세요

잠깐 외출하고 돌아오는데, 아파트 현관 앞으로 할머니가 아기 한 명을 손에 잡고 뙤약볕을 걸어나옵니다. 제가 사는 라인 쪽이라 인사를 건넸지요. 그리고 아기도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지요. 할머니는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오랜만에 딸 아들 집에 다니러 온 분 같았습니다. 아니면 시어머니께서 오랜만에 왔을 수도 있고요. 귀여운 아기를 뒤로 하고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가는데 인사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순간 기분이 팍 상합니다. 우리집 아이들 3남매가 30대 초중반이니 결혼했으면 모두들 손자 손녀를 볼 나이고, 현직에서 퇴직하여 본격적인 노후 세대로 접어들었기에 분명 할아버지란 말을 들음직한 나이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할머니가 굳이 돌아서 가는 사람에게 '할아버지'라는 말을 해서 지금껏 귀여운 아기랑 좋은 대화를 나누며 갖게 된 좋은 감정까지 싹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싶습니다. 그것도 굳이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이지요.


세상 살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불쾌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딜 가도, 어딜 봐서도 제가 할아버지라고 불려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얼굴도 모르는 그것도 저보다 나이가 한참 많으신 할머니가 굳이 '할아버지'라고 두 번 반복하여 부르니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썩 좋지 않더군요. 제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이겠지요. 저도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속좁은 인간으로 변해가는가 봅니다.


제가 소속된 모임에 나이가 많은 선배님들이 꽤 많이 계십니다. 그리고 퇴직 후 시니어를 대상으로 강연을 할 기회가 가끔 있습니다. 그때 상대방에 대해 시니어, 어르신, 실버 따위의 용어는 쓰지 않습니다. 분명 상대방을 높이는 용어긴 하지만 어딘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시내버스에서도 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저보다 연배가 높음직한 분들께 자리를 양보할 때도 절대 '어르신'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냥 '여기 자리에 앉으세요. 앉으십시오."등으로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분들께 자리를 양보하면서 굳이 '할머니, 할아버지'로 호칭하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창립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모임에서 웬만하면 형님 누님으로 대체합니다. 모임에 갓 오신 분들께는 선배님으로 호칭을 통일합니다. 단어 하나라도 상대방에게 늙음을 인식하게 하는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굳이 늙음과 직결되는 단어를 써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오랜만에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같은 값이면 듣기 편안한 단어를 쓰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 모임에서 80대가 선배님이 함께 하는 날엔 다들 큰형님으로 부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저녁 내내 싱글벙글 하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문어체 문장을 쓰는 문서상 기록물 같은데야 어쩔 수 없이 노인, 시니어, 실버, 할아버지, 할머니 등으로 명확하게 써야 하겠지요. 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구어체 문장이 지배하는 인간 관계의 대화에는 가급적 사람을 편하고 즐겁게 하는 단어를 쓸 것을 권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길가다 갑자기 어디선가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돌리고 싶던가요. 물론 내 손자 손녀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와 전혀 관계 없는 낯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굳이 그렇게 부를 때 거부반응이 생기지 않던가요. 저는 그래서 그분들을 부를 때도 '할아버지, 할머니'란 말은 극구 피합니다. 그 어휘를 아예 쓰지 않고도 대화는 충분히 가능하지요. 그냥 손짓하여 옆에 오시게 한 뒤에 자리에 앉게 한다거나, 먹을 것을 하는 등등의 의사 소통은 충분기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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