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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01. 2023

나이가 들면 들어야 하는 말

뭐든 잘 먹으니 보기 좋아요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합니다. 단순한 밥짓기지만 반복하는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더군요. 그냥 쌀만 씻어서 안친다면 그건 단순할 수 있지만, 주문해서 사먹는 일이 많아진 요즘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급적 건강식을 먹이고 싶으니 좀더 생각해 보게 되고, 그러면 인터넷을 검색하여 하나라도 우리 몸에 좋은 식자재를 찾기 마련이지요. 경북 상주 처가에서 처남이 가을 추수가 끝나면 해마다 몇 가마씩 최고 품질 '상주미'를 보내주니 쌀은 고민이 되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 수라상에 쓰여 진상미로 평가받는 유명한 쌀이거든요. 장인 장모님 살아 계실 때 저와 아내의 신혼 때부터 해마다 정례 행사처럼 받았던 쌀입니다. 처음 한두 번은 쌀을 보내지 마시라고 간곡하게 말씀드렸지만 해가 가면서 이젠 당연히 받아도 되는 양처럼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살아 계실 때는 당신의 "딸"과 살기에 그래도 받을 명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제 자신만의 합리화도 가능했지만, 그것도 억지로 말이지요. 두 분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고향을 지키는 처남 그것도 1남 6녀 중 제일 막내인 처남 부부가 고생 고생하여 보내주는 쌀은 받기가 좀 그랬습니다. 여섯 누나 중 제 아내에게 가장 살갑게 대하는 처남이지만 저 입장에선 처음엔 부담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젠 쌀을 보내라 말라 말도 하지 않는 뻔뻔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말이지요.


그렇게 고품질의 쌀에 알밤, 찹쌀, 흑미, 팥, 렌탈콩, 일반 콩 등을 섞어 밥을 지었습니다. 어떤 책에 음식도 궁합이 맞아야 된다며 아무 음식을 함부로 섞으면 궁합이 맞지 않아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고 나와 있더군요.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매뉴열대로 밥을 지었는데, 살짝 맛을 보니 괜찮네요. 비주얼도 좋구요. 아침밥을 짓고, 아내가 주문해서 냉장고에 둔 '연포탕'을 끓여 국으로 대용합니다. 아내가 늘 먹은 전복죽과 해독주스 그리고 한약을 데우고 냉동된 수건에 물을 뿌려 펼쳐놓고 대기합니다. 약을 먹기 쉽게 끓인 물과 찬물을 적당하게 섞어 대기해야 합니다. 아내 아침 식사를 온전히 준비하고 언제 부를지 모르니 신경을 곤두세우지요. 이제 이것도 3년째가 되니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잠깐 짬을 내어 책을 펼칩니다. 안희연의 <단어의 집>인데 2023년 부산광역시 원북에 선정되었고, 제가 참여하는 독서회 이번 달 대상 도서라 예습 삼아 읽었습니다.


아내가 거실로 나옵니다. 간밤에 잠을 잘 잤는지 표정이 매우 밝습니다. 그리고 냉장고 한 켠에 있었던 김밥을 내놓습니다. 어젯밤에 배달시켜 먹다가 남은 것을 내놓았습니다. 당연히 차갑겠지요. 아내가 따뜻하게 데워줄까 하고 물었지만, 책상 위에 놓인 김밥 하나를 덜렁 입에 넣었습니다. 뭐 따뜻하게 할 필요 있나. 이렇게 먹어도 맛이 좋은데 뭐. 진짜 그랬습니다. 차갑게 식은 김밥이지만 먹어보니 신선하고 느낌이 좋았습니다. 아이들은 남긴 것은 잘 안 먹기에 저에게 권했는데, 정작 저는 그게 맛이 좋더군요. 아내가 한 마디 합니다.



"우리집에 웬만한 거는 당신이 마지막에 다 처리하네. 진짜 뭐든 잘 먹네. 난 찬 음식이라 신경이 쓰이는데, 당신은 뭐든 잘 먹어서 그게 좋아."


아내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 남은 김밥을 다 먹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 입에서 어떤 음식이 맛이 없다라는 말은 거의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살아 생전에 음식 솜씨 없다고 아버지께 타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 당신 스스로도 음식 솜씨 없노라고 실토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어린 저는 그런 말을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음식 타령을 하는 것을 듣고 있던 제가 아버지께 대들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자존심이 생했을까를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지나친 언사였지만, 당시엔 제 자신이 당당했다고 여겼지요. 어머니를 위해서 말입니다.


"엄마한테 음식 갖고 너무 뭐라 카지 마이소. 엄마는 하루 종일 새벽부터 밤까지 혼자서 들판에 나가 일하는데 음싱이나 할 시간이 있습니꺼?"


제 나름대로는 어머니 음식 솜씨 없는 것을 변명하고 어머니 자존심을 세우노라 그런 논리로 대들었지만, 전혀 상관 관계 없는 무논리의 말대꾸였지요. 들에 일하는 것하고 음식 솜씨는 아무리 엮으려 해도 관계가 형성되지 않지요. 그래도 어머니 편에 서서 강변했었더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난 아부지가 뭐라 캐도 엄마가 해준 거 다 맛있다. 진짜다."


어머니께서


"니는 뭐든 잘 먹어서 나중에 느그 색시한테 진짜 사랑 많이 받을 끼다. 그라고 음식 잘 먹는 사람이 나중에 보면 잘 산다. 니가 그래 맛있게 먹는 거 보이 나도 마음이 정말 좋다."라고 하시면서 저를 덥석 안아주셨습니다.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다가 저녁에 집에 오셨으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땀이 온몸에 절여 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 품속은 지금도 진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퇴직하기 전에 고3 어느 반 교실에 들어갔을 때, 학생 한 명이 질문합니다. 학교 급식 어떠냐고 말입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 급식 맛이 없다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던가 봅니다. 저는 전혀 몰랐지요. 하루 세 끼 중 유일하게 동료들과 어울려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담소를 나눌 기회니까 점심 식사 시간 자체가 고마운 시간이엇지요. 평소에도 음식 타령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급식 맛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생 질문에 제가 답했습니다.


"난 점심 식이 괜찮던데, 맛도 좋고 좋아하는 반찬도 많이 나오고 말이지. 그런데 느그들이 잘 생각해 봐. 어머니가 매일 해주시는 밥도 맛이 없을 때가 있지 않나. 난 그냥 맛잇게 먹는다 왜."


아이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눕니다. 대충 분위기를 살펴 보니, 제 말이 그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책을 펼치고 공부하자고 하면서 몸을 칠판 쪽으로 돌리는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우리 선생님은 아무래도 영양사 누나가 이상형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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