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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03. 2023

나이가 들면 회상(回想)하고

달밤이 저렇게 아름답게 빛나는 강변 둑길 그 추억의 공간으로 걸어가고 싶어집니다. 나이가 들어 추억을 더듬어 지난 날을 따라가면 늘 열 일곱 살에 머무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 최초로 돌아간 흙으로 서서히 떨어져 간다고 했는데, 저는 서서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린 시절 제 삶의 추억이 가장 많이 남은 열 일곱 살 딱 그때로 곧장 직행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인생에 무슨 획기적인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어린 시절 특정 시기 추억에 젖어 있으면 지금 삶에서 퇴행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달밤 강변 그 둑길은 너무나 그리워, 언제 기회를 만들어 그곳 가까이에 숙소를 정하고 다시 한번 달밤을 홀로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절 강변 둑길을 걸어가다보면 두 줄 평행선으로 나란히 달리던 수로(水路) 사이로 조용 조용하게 흘러가던 물소리도 같이 걸었습니다. 물살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물풀도 떠오르고, 둑길에 앉아 두 발을 물에 담그면 그 감촉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물살이 발가락 사이를 살살 간지르는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네요. 노란 호박꽃이 곱게 필 무렵이면 그 물길은 무성한 호박잎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호박꽃을 흔들어 달밤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지요. 당시 유행했던 팝송도 떠오르고요. 우리 또래 중 인물도 좋고 키도 훤칠한데다가 기타도 정말 잘 치던 아이가 있었는데, 소녀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아이가 기타를 들고 그 물길에 걸쳐 있던 콘크리트 작은 다리 위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기타음에 맞춰 노래 부르면 소녀들도 합창을 했지요. 그리고 김정호 노래도 즐겨 불렀는데, "우우~생각을 말아요~"가 기억납니다. 그들 모두 세상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을 것이고 60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노년 세대를 살아가고 있을 테지요. 


이런 달밤이면 우리 또래 아이들이 집을 나와 동네 골목 골목에 쏘다니고, 좀더 큰 아이들은 마을을 벗어나 길게 나 있던 들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저 멀리 길고 높다랗게 난 강변 둑길에 올라서면 청량한 밤바람이 강물 위로 달려와서 우리들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마을로 난 들길을 따라 깊은 밤을 새벽으로 이어줍니다. 새벽엔 강가에 서 있는 수많은 수양버들 사이로 물안개가 곱게 올라와 우리들을 감싸주었지요. 집만 나서면 자연의 품으로 그냥 들어갈 수 있었던 당시 달밤 추억을 떠올립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또래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달밤 아래 길게 난 들길을 걸어가며 누군가의 웃기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폭소를 터뜨리거나 행여 그 이야기를 못들을까 조바심 내어 대열 가운데로 서로 들어서려는 보이지 않는 경쟁도 새로 해보고 싶습니다. 너무나 착하고 순진했던 당시 또래들의 그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하고 저멀리 변함없이 서 있는 수양버들을 바라봅니다. 


특히 여름날 밤의 달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좋았습니다. 낮에 수박밭에서 하루 종일 풀뽑고 거름주고 수박 순도 자르면서 뜨거운 햇볕에 풍성하게 익어가며 들판에 길게 누운 수박들을 돌보느라 하루 종일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상품성이 떨어지는 어딘가 상처가 난 수박을 들고 강물로 달려가 붕 뛰어 들면 정말 행복했습니다. 수박을 잡고 살짝 손을 대면 물에 뜰 수도 있습니다. 수박 하나에 둘 셋 모여 들어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던 그때의 얼굴들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강물에 뜬 수박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짧은 순간 온갖 이야기가 나왔지요. 여기 없는 친구들 욕도 하고, 예쁜 동네 여자애도 화제에 올렸습니다. 수박에 손만 대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우리들 모두 물속에서 두 발을 열심히 젓고 있었기에 뜨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사진 인용 "안동월곡초등학교35회 | 내고향 수박밭 -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 Daum 카페"

가끔 대구 시내에서 시골로 놀러나온 사람들이 수박을 사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멀리서 일부러 사러왔기에 좀 싸게 내놓아야 하는데, 파는 사람 입장에선 언제 볼지도 모를 뜨내기 손님에게 우선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여 좀더 비싸게 팔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단골 손님도 만들 수 있는 그리고 지속적인 수익도 만들 수 있는 마케팅 능력이 제로였다는 것이지요. 당시 농민들에게 그런 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수박을 사들고 가는 사람들이 돌아서서 한 마디 하던 것도 생생합니다. 


"여기 오면 좀 싸게 해줄 줄 알았는데, 왜 이리 비싸. 다음엔 절대 안 와."


진짜 한번 온 손님이 다시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예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다고 농민들이 그런 것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기게 무덤덤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수박이 싱싱하게 달려 날마다 커가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람다운 한 폭의 그림입니다. 낮에 저렇게 생생한 수박을 원없이 보다가 밤이 되면 세상이 그냥 고요에 젖어듭니다. 평화로운 별천지가 되는 것이지요.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달밤에 저곳으로 걸어가면 세상 누군가가 저처럼 추억에 젖어 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리 낮게 내려앉은 보름달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날이면 어린 시절 추억이 더욱 크게 솟아올라 우리 곁으로 살며시 다가올 듯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만날 어린 시절 그 벗들이 몇 명이라도 저만치서 달려와 반갑게 손을 맞잡고 걸어갈 수 있을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향 마을 아직도 저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집에 하룻밤 묵을 비용을 기꺼이 지출하고 달밤이 강물과 함께 걸어가는 이곳까지 가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달빛을 받아 탐스럽게 빛나는 수박들이 밭 곳곳에 자리잡았습니다. 수박을 노리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원두막을 지었지만, 실제로 도둑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더운 여름날 피서지로 훨씬 많이 이용되었지요. 밤엔 시원한 강바람이 원두막으로 밀려와서 더욱 청량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30여 년 전에 손가락 정도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던 수양버들 모습이 이젠 장대한 숲을 이루고 서 있었을 테지요. 그 숲속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소달구지도, 경운기도, 트랙터도 정말 많이 오갔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요. 새참을 머리에 이고 멀리서 걸어오던 어머니도 보입니다. 수양버들 가지 사이로 점점이 움직이는 어른 셋이서 무와 배추 씨앗 파종할 때 곱게 만들어 놓은 이랑을 발 뒤축으로 한 번 짚고 씨앗을 넣은 다음, 뒷발로 흙을 덮었지요. 셋이 나란히 그렇게 씨앗을 심던 모습이 지금은 뚜렷한 실루엣으로 다가옵니다. 아버지와 원뜽 아재는 생각나는데 한 분은 갑자기 떠오르지 않네요. 흰 색 옷에 밀집모자를 쓰신 세 분이 한 이랑씩 맡아 나란히 서서 씨앗을 심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멋진 그림입니다. 특히 저녁 무렵 석양이 강물 위로 내려와 온 세상을 발갛게 물들이고, 힘차게 솟구치는 잉어떼도 장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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