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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04. 2023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라

노후 건강을 위해 매일 만 보 걷는 길입니다.

점심식사를 기분 좋게 마치고 잠시 대안학교를 벗어나 시내를 걸었습니다. 대안학교가 시내에 있으니 사람 구경도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이소에 가서 휴대폰 충전기 C 타입을 두 개 사고 돌아오는 길에 졸업생을 만났습니다. 서로 스쳐 지나가는데 아무래도 얼굴이 낯익어서 잠깐 서서 서로 쳐다 봅니다. 그리고 그 졸업생이 먼저 인사를 건네오고, 옆엔 예쁜 여학생도 서 있네요. 얼굴은 본 것 같은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제가 머뭇 머뭇합니다. 그럴 때 제가 많이 쓰는 말, 


"야~ 니~ 얼굴은 알겠는데," 하니까. 그 졸업생이 즉시


"샘 저 모르겠습니꺼. 탁~" 라고 합니다. 그 순간 저도 그 이름이 생각났습니다. 


"맞아, 탁00 맞제."


졸업생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니까 고맙다는 듯이 갑자기 쑥 다가와 저를 안아버립니다. 요즘 졸업생들은 남자들끼리 허그를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저도 처음엔 남자까리 허그를 하는 것이 참 어색했는데, 요즘엔 익숙해져 적응이 됩니다. 가끔 시내를 걷다가 보면 어디서 난데없이 달려와 제 허리를 콱 끌어안고 올려다 보는 남자 졸업생이 저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이 졸업생은 그 정도는 아닌데 허그를 하면서 간호학과 졸업반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여자 친구도  같은 과 후배인데, 인상이 참 순하고 착하게 보여 훗날 멋진 간호사가 될 듯합니다. 


제가 32년 근무하면서 지도한 학생들은 남자학교라 이 졸업생이 입학 원서 작성 당시에 간호학과를 지원한다는 것이 참 낯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반 학생이 아니었기에 제가 직접 개입할 것은 아니었지만, 남학생이 간호학과를 간다는 사실이 좀 그랬지요. 그래서 반에 들어가 '남자 간호원'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이들 몇이서 저에게 살짝 구박을 했지요. 


"요새 남자 간호원이 얼마나 많이 필요하다고요. 실제 병원에서 힘센 남자 간호원이 없어서 환자를 돌보는데 애를 먹는다 안 캅니꺼. 그라고 남자가 간호학과를 졸업하면 취직하는데 어렵지 않다고 하대예. 그카이끼네 요새 간호학과 경쟁률이 마이 높아졌다 카더라꼬요. 선생님 세상 물정 잘 모르시는 것 아입니꺼?"


아무리 제가 세상 물정에 어둡다지만 아이들, 그것도 19살 짜리 고등학생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참 한심스런 상황이었지요. 그래도 아이들을 워낙 좋아했기에 내가 잘 몰랐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학년실로 돌아왔지요. 저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병원 신세를 거의 지지 않아서 그 실태를 잘 몰랐기에 남자 간호학과 학생이 더욱 낯설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교무실 한가운데 퇴직예정자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적이 많았습니다. 거의 매일 그렇게 점심시간 끝날 무렵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두어 살 아래 여 선생님이 정색을 하면서 우리들에게 다른 자리로 가면 안 되느냐고 타박을 준 때도 있었습니다. 30여 년 함께 생활하다 보니 웬만한 형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친했기에 여 선생님이 뭐라 해도 우리가 기분 나쁘게 반응하지 않고 대답하였지요. 


"예, 마마 잘 알았사옵니다. 저희들 이제 이곳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아쉬워서 그러하오니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라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그러면 그 여 선생님도 기가 찬다는 듯이 웃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들 담소가 이어지는데, 갑자기 '스탠스' 에 관한 화제가 나왔을 때 제가 동료들에게 물었지요. 


"스탠스가 도대체 뭐꼬?"


분위기가 싸해집니다. 당시 저는 스탠스가 뭔지 진짜 몰랐거든요. 제가 그런 것을 접할 일도 없었고, 주위 사람 중에 그런 것을 말해 준 사람도 없었기에 당연히 모르기도 했고요. 그때 동료들 중에 여섯 명이 스탠스를 했다는 말에 정말 놀랐습니다. 겉으로는 다들 멀쩡했습니다. 그리고 스탠스에 대해 무지 몽매했던 저를 보고 모두 한 소리합니다. 건강한 것 표내느냐고. 제가 건강한 것을 일부러 표내려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전체 분위기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날 저녁 술값을 제가 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 있었던 상황인데 그렇세 술값을 억지로(?) 내면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어묵 센터에서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거든요. 


교무실에서 그렇게 매일 점심 시간에 담소를 나눌 때 어느 선생님께서 '남자 간호원'이 병원에 수요가 많은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더군요. 그래서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다음 수업 시간에 아이들 앞에서 제가 다 아는 것처럼 설명했더니 아이들이, 


"그건 저희돌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해서 참 무안했습니다. 저는 자랑도 능숙하게 잘 못합니다. ㅎㅎ.


그렇게 졸업생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제가 한 마디 던졌습니다. 


"00아 니 성적으로 그 대학에 간 거 진짜 아깝더라. 그렇지만 이렇게 된 이상 대학병원 면접이 며칠 뒤라고 하니까 꼭 합격하길 바란다. 합격하면 연락해라. 알았제. 잘 가거라. 여자 친구도 잘 지내세요."


헤어지면서 살짝 보니까 여학생이 우리 졸업생에게 뭔가를 자꾸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고교 시절 진짜 공부를 잘 했느냐고 말이지요. 말 한 마디에도 졸업생이 자신감을 갖고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도록 말 한 마디라도 신중하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점심 시간 시내 구경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오니까, 젊은 여 선생님 한 분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옛날에는 그런 것을 몰랐는데, 지금은 진짜 인생의 최고 목표가 '행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들면 젊은 세대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늘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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