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자녀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지인 분들이 저에게 하소연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보다 훨씬 인생 선배인데도 오히려 저에게 해결책을 찾으려 해서 의아하지만, 얼마나 답답하면 저한테 그럴까 싶어 들어줍니다. 저도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고 제 생각을 전하는 것이 전부이지요.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란 말이 있지요. 그건 진짜 맞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뭐라고 주의도 줄 수 있었지요. 이제 성인이 된 자식에게 강도(强度)가 센 멘트는 매우 위험천만한 짓입니다. 향후 자식 얼굴도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라고 해서 늘 자녀들보다 현명하란 법은 없습니다. 자녀들도 어느 정도 사회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제 나름의 철학이나 인생관, 가치관이 정립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마냥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실제로 저에게 하소연하시는 선배님의 말을 들어보면 제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순전히 부자지간의 대화 부족과 고압적인 아버지의 자세가 문제 원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가 파악한다고 해도 제 생각을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 해결이 아닌 새로운 갈등 유발의 문제를 촉발시킬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제 막 퇴직한 입장이니 선배들이야 저보다 훨씬 오래 전에 퇴직하였지요.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갈등을 겪어도 누군가에 속시원히 말할 기회도 없다네요. 그래서 고른 게 저라는데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니 이 선배님도 실망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선배님의 그 고압적인 자세가 문제이니 고치라고 감히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더군요. 조금은 듣기 싫은 충고를 할까 하는 마음이 목까지 올라 왔다가 그냥 막걸리 한 잔에 삼킵니다. 이 선배님 평소 말투에 "이 새끼, 저 새끼"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분입니다. 그래서 기껏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선배님, 혹시 아들하고 둘이 앉아 대화할 때, 새끼란 말 자주 하시나요?"
그러자 그 선배님께서,
"에이, 이 사람아 내 자식한데 이 새끼 하는 기 뭐 그리 심각한 기고 할 수 있는 거 아이가. 경상도 사람들 다 내 같이 그렇게 아~들한테 편하게 말할 걸. 다른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새끼' 카는 기 뭐 그리 문제라꼬 생각하노."
저는 그 말을 듣고 그냥 미소만 지었습니다. 대충 분위기로는 그 선배님의 말씀에 제가 동의하는 듯하게 흘러갑니다. 더 이상 선배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부인께는 어떻게 말을 하는지 물어 보려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 선배님이 술을 한 잔 하시고 하셨던 말이 떠올랐거든요.
"내가 젊을 때 진짜 고생 고생해서 돈을 그렇게 벌어주었는데, 이젠 나도 나이가 있으이 좀 쉬고 여행이나 다녀야 할 꺼 같아. 마누라도 내한테는 별 불만이 없을 끼다. 암믄 내같이 잘 하는 남편이 어디 있을라꼬."
글쎄요. 진짜 그럴까요. 남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젊은 날 혼신을 다해 가족을 건사하면서 돈을 벌어주며 고생했으니 이젠 충분히 대접받으며 노후에 여유를 즐길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 말이지요. 물론 그 생각대로 충분히 대접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 긴 세월 부인도 그냥 놀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랍니다. 액면상의 일정 금액을 벌어오지 못했을지라도 가정 내에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평생 고생한 것은 돈으로 절대로 계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랍니다. 그리고 부인들도 이젠 쉬고 싶을 나이가 되고 집을 나가서 친구들과 마음껏 즐기는 시간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 노후 세대가 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상당수 남자들이 나이를 먹고 현직에서 물러나 본격적인 노후 생활에 접어들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측면도 있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내 아내와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현재 생각은 또 어떤지 곰곰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이가 들어 지난 삶을 돌아보니, 아내에게 잘 해준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사실 따지고 보면 문제투성이였고, 부족한 점이 정말 많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 사람들 누구든 자신의 삶에 잘 했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스스로가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반성할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육체적 노동을 억지로 해서 희생하란 뜻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신을 움직여 임금을 받아 가족을 위해 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무리하게 해선 곤란합니다. 자칫 육체적 노동을 무리하게 해서 몸에 탈이나 나면 그것이 자신의 고통에서 머무르지 않고 가족 전체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음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가정 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진정 존경하는 말투를 써야 합니다. 저도 언젠가 아이들과 둘러앉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야~야, 내가 혹시 너희들 어릴 때 말을 험하게 하거나, 체벌을 한 적이 있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것이 있었을 것 같은데."
큰아들이 두 동생을 대표로 하여 답합니다.
"아버지께선 험한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신 경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들이 뭔가 잘못했을 때 혼내신다고 체벌한 것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안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고, 저희들 생각에 뭔가 잘못 했기에 지금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희들에게 워낙 잘 해주셨기 때문에 체벌이나 험한 말씀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느그들도 그렇제?"
딸 아이과 막내 아들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제가 예민하게 관찰합니다. 그냥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인지, 그냥 그 순간에 곤란해서 그렇게 동의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왜 이런 것을 새삼스럽게 물어보시냐고 하더군요. 저도 그냥 얼버무립니다. 그 정도면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더 이상 질문을 이어나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아이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미 지나간 시간에 뭔가 잘못 했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절대 그렇게 하지 말하야 하겠노라고 결심하였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미소띤 얼굴로 부드러운 어조로 천천히 고운 말를 쓰면 그 집안은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불행할 수가 없습니다. 굳이 입에 '존경'이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존경의 마음을 실어 가족들을 대하면 우리 스스로의 노후도 저절로 행복해지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노력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