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그렇게 폭우가 쏟아져서 운전하기가 정말 힘들 정도였는데, 늦은 밤 지금 이 시간은 거짓말처럼 세상이 조용합니다. 저녁엔 아이들도 집에 없고 해서 아내를 위해 낙지 전골을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비주얼은 봐 줄 만한데 음식 맛은 생각보다 별로입니다. 그래도 제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아내를 위해 요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오늘처럼 특별한 시도를 한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ㅎㅎ.
아내는 숟가락으로 한 번 떠서 먹으며 맛이 좋다고 말해 주지만 그건 그냥 저에게 빈말인 거 다 압니다. 제가 먼저 맛을 보았기에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시도해서 특별한 맛이 나도록 해보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그럼 다음엔 기대해 볼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오늘 낙지 전골 요리는 별로라는 반증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도 저 혼자만 속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음식 맛이 설령 부족한들 뭘 새삼스럽게 이러쿵 저러쿵 할 건 아니지요. 운이 좋아 큰아들이라도 시내 게스트하우스 주말 숙박 3박 4일 알바 중에 어쩌다가 집에 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 많은 것 제가 모두 먹어야 할 판입니다. ㅎㅎ. 주중엔 평소처럼 직장 생활하고 주말엔 다시 숙박 알바를 하는 큰아들이 자신의 일에 워낙 충실한 사람이라 집에 잠깐이라도 다니러 올 가능성이 전무하지요.
아내는 낙지 전골을 조금 먹더니 다시 TV 앞으로 달려갑니다. 유튜브에 연결된 대형 TV 앞에서 영국 프로축구 경기 짧은 동영상을 거의 섭렵합니다. 요즘 영국 프로축구 EPL에 깊이 빠져 저녁 내내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합니다. 다른 여성들은 젊은 트로트가수에 빠지기도 하고, 드라마 광도 있던데, 제 아내는 전혀 다르네요. 영국 프로축구에 관한 지식이 대단합니다. 저도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를 참 좋아했는데, 요즘엔 TV 자체를 잘 안 보기 때문에 스포츠 경기를 볼 기회도 거의 없습니다. 손흥민 경기는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경기의 흐름, 감독의 작전, 선수들의 컨디션, 전술 전략에 맞춤형 선수 뎁스, EPL 비하인드 등에 관해 정말 빠삭하네요
어떨 때는 EPL관련 동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저에게로 옵니다. 그리고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영국 프로축구 화제를 시작합니다. ㅋㅋ. 가끔 원고 쓰기에 정말 바쁜 저를 붙잡아놓고 EPL에 대해 아주 신나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마지 못해 그냥 반응을 해주는데 아내는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를 길게 길게 합니다.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아내가 계속 이야기를 하니 마지못해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건강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니 저렇게 떠들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내 말 진짜 잘 잘 들어준다. 당신이 내 대신에 상담사 일을 하면 진짜 잘 할 것 같아. 난 직장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당신은 진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니 상담사 잘 할 것 같아."
이렇게 되면 아내 말을 더욱 잘 들어주어야 하겠지요. 의무감으로 말입니다. 나중에 낙지 전골이 맛나도록 뭔가를 추가해야 할 듯한데 마땅히 생각이 잘 나지 않네요. 그래서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산책을 나섭니다.
아파트 주차장 너머 저 멀리 밤바다가 묘박지에 가득한 선박들 불빛을 받아 밝게 보입니다. 청량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갑니다. 이제 제 나이도 본격적인 노년 세대에 접어들었는데, 그래도 복(福)받은 인생이라 밤바다를 이렇게 편안하게 누릴 수 있음에 세상 사람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가족, 친지, 지인, 동창, 선후배 등등 말입니다. 가만히 서서 불빛을 한참이나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시 걸어갑니다. 서울 강남처럼 휘황찬란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긴 사람들에게 늘 평화를 가져다주는 진짜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는 것에도 감사한 일입니다.
다시 음식 생각에 잠깁니다. 오늘은 생전 하지 않았던 '낙지 전골'을 무리하게 시도하다 실패했지만, 내일 다시 뭔가를 시도해 볼까 하고 말입니다. 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헤 보았습니다. 낙지 전골 솔직히 말하면 제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술 안주로 말입니다. 아내도 낙지 전골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오직 제 입맛만 생각해서 시도하여 아내가 별 관심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아내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돌아가신 장모님께서 해주신 건어물을 구워서 그 위에 양념을 발라 먹는 거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언젠가 아내와 둘이서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서로 뭘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였습니다. 제가 먼저 그랬습니다.
"있잖아. 우리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그럴 일이 거의 없겠지만, 혹시 아나 그런 일이 생길지. 나중에 어떤 사회자가 우리 둘을 놓고 진짜 부부인지 아닌지 테스트한다고 좋아하는 음식이나 요리를 물을 때 그때 가서 부랴부랴 입을 맞출 것이 아니라 지금 미리 확인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그랬더니 아내가,
"아이고 세상에 우리가 뭐 그런 일이 있을라고. 아무도 우리 부부 테스트 할 사람이 없고 둘이 뭐 좋아하는 물어 볼 사람은 더 없다. 그래도 확인은 해두어야지. 남이라는 말을 안 들을라카믄."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것을 먼저 제시하였지요. 아내가 빵 터집니다. 어디 가서 그거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구요. 너무 없어 보인다면서 말입니다. 제가 좋아한다고 밝힌 반찬이 뭐냐면,
"당신이 우리 결혼하고 해주었던 '고추찜, 가지 무침, 감자 채썰어 볶은 것'이 내가 좋아하는 3대 반찬이다."
현직에 있을 때 아내가 집에 고추찜을 해서 가득 가득 넣어둔 것이 생각나 직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지 않고 집에 혼자 와서 고추찜만 갖고 점심밥을 정말 맛있게 먹을 정도였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저 혼자 좋아 죽겠더군요. 혹시 아이들이 저 몰래 먹을까 봐 반찬들 사이에 가급적 깊이 숨겨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 그 누구도 고추찜은 별로 좋아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ㅎㅎ. 그리고 식탁 위에 하얀 봉투에 조금 비싼 반찬값을 넣어 두었지요. 아내의 반찬 솜씨 진짜 좋아서 잘 먹었노라는 메모와 함께 말이지요. 그 다음부터는 아내가 돈이 조금 필요하다 싶으면 고추찜을 가끔 해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도 내일 아침엔, 점심이나 저녁엔 아내가 좋아하는 건어물을 구워서 그 위에 양념을 발라 내놓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