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이십대는 그냥 그 나이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당시엔 학교 공부에 온힘을 다 기울이고 성적이라도 떨어지면 하늘이 무너진 듯하던 그 시기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었지요.
1977년 시골 달성군 논공면 위천1동 120번지에서 경서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시내 고교 연합고사에 합격하여 대구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정말 꿈도 많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롭지만 제 자신의 자존감은 엄청났습니다. 당시 중학교에서 동기들 중에 대구시내 연합고사에 합격한 친구가 6~7명 정도였는데, 그것도 큰 자랑거리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지금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ㅎㅎ. 그래도 고교 입학 당시는 정말 좋았습니다. 세상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시골에 하루 시외버스가 10번도 채 안 오는 깡촌이었지요. 지금이야 대로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경북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대구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섞여 소위 말하는 TK문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진짜 TK는 대구 경북이 아니라 경북고등학교 출신 서울대학교 합격생을 말하는 의미지요. 그들만의 리그는 따로 있었으니까요. 고교 연합고사가 아닌 대구 경북 지역 인재를 싹 쓸어가서 서울대학교에 해마다 180여 명씩 합격시켰던 경북고등학교가 최고였습니다.
본격적으로 하숙을 하기 전 집에서 통학을 했는데, 시골 마을 입구에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인문계고교 학생들은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스스로 에리트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고, 공고 상고 농고 등 실업계 학생들은 열등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 여름이면 하얀 색깔의 여고생 교복이 우리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특히 바로 인근 마을 1년 선배 여학생이 하얀 하복을 입고 두손으로 가방을 조신하게 잡고 서 있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그림 같습니다.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지만 그 모습은 눈에 선합니다. 차안에서 시끌벅적하던 남학생들도 그 여학생을 보면 순간 조용했지요. 차에 올라도 다른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던 그 선배 여학생! ㅎㅎ
그렇게 가슴 설레던 고교 시절 시골 중학교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선생님들이 교실에 들어오셨습니다. 한번은 독일어 선생님께서 헤르만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인용하면서 혼자 감탄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우린 힘들어 죽겠는데, 선생님 당신은 편안하게 교직을 하면서 월급도 받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저렇게 속편한 소리 한다고 수군거렸던 기억도 납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을 하고 우린 동조하고 있었지요.
또 어느 영어 선생님께선 수업하다 말고 갑자기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읊었습니다. 고교 1학년 국어 책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느거 어떻노? 이 글 죽이제. 난 아무리 봐도 이 구절 좋단 말이다. 느그는 모린다. 조금만 나이 묵으바라 이 구절 생각만 해도 기가 찰 기다. 다시 수업 가자.
송성문의 성문종합영어 독해 부분을 신나게 해석해 주시던 영어 선생님이 갑자기 언급한 '청춘예찬'도 당시엔 낯설었습니다. 참 전 평소 영어를 너무 좋아해서 영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성문종합영어를 겨울방학 때 미리 예습을 다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행이던 미국 NEWSWEEK 원문을 스크랩해서 공부하기도 했지요. 시건방은 하늘을 찔렀을 정도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웬만한 영어 원문은 사전이 없어도 독해가 가능할 정도입니다. 제 자랑이 심했나요? ㅎㅎ.
이제 나이 들어보니 당시 그 선생님들이 말씀하신 '청춘예찬',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처절하게 실감합니다. 아니 꼭 10대만인가요. 20대 30대 40대는 또 어떻습니까. 절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꼭 그 시절로 한번 돌아간다면 정말 의미있게 보내고 싶습니다. 아아! 청춘이 아름답기만 합니까? 이제 본격적인 노후 시대에 접어들면서 지난 날의 추억에 젖는 날이 많습니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시절도 정말 많습니다. 함께 하던 사람들이 사라져가니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은 어디 모임에 가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접하려고 말을 잘 들어줍니다. 그중에는 눈치없이 자신의 말만 많이 하여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삶을 접하면서 제 자신의 인생도 더욱 풍요러워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특히 환한 미소와 함께 잔잔한 말씀을 이어가는 선배님들의 여유 있는 모습에서 제 삶의 행복을 더욱 크게 느낍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때 진짜 즐겁습니다.
저보다 연하 또는 젊은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할 때는 그렇게 동석을 시켜주어 고맙다는 말을 자주 꺼냅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런 말 하시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제 입에서 저절로 나옵니다. 돈이 많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젊은 친구들과 모임을 할 때는 가급적 제가 밥을 사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ㅎㅎ. 그렇게 사는 것이 노후 세대의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써 봤자 몇만 원 정도밖에 안되니까요. 그렇게 식사라도 대접하면 몇 십만 원의 고마운 마음을 되돌려 받는 것 같습니다.
청춘!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운 말입니다. 지금 30대 40대도 정말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고 계시겠지만 그 시절이 훗날 참으로 행복했던 시기라고 스스로 생각할 날이 반드시 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