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세월 너머 추억으로 달려 갑니다. 스무 살 참으로 좋은 때였습니다. 길게 난 들판 보리밭길 따라 90cc 혼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지요. 고향 마을을 벗어나면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너른 들판이 나옵니다. 들판 모두가 보리밭 녹색이 가득한 그 사이 들길을 따라 한참 달리다 보면 둑길에 올라서고 흘러가는 강물과 나란히 둑길을 달립니다. 진한 녹색의 보리밭은 아무리 봐도 아름답습니다. 그곳을 홀로 달리는 이제 갓 스무 살에겐 세상 힘든 것이 없었지요. 그냥 좋았습니다. 둑길을 한참 달리다 보면 나루터가 보입니다. 벙어리 사공이 직접 노릇 젓거나 강을 횡단하여 매어 놓은 굵은 동앗줄을 이용하여 그곳 산골 사람들을 강 건너로 실어다 주었지요. 당시 나루터의 배에 달린 노는 꼭 방앗간의 디딜방아 사이즈와 비슷하여 매우 컸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야 다리가 생기면서 그 나루터도 추억의 공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끔은 추억을 더듬어 그곳에 가서 그 시절의 사공을 떠올리며 산골 마을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 마을 사람들도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늙었겠지요. 살아 계신 분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그 사람들도 저처럼 옛추억에 젖어 있을 수 있겠지요. 요즘은 무엇을 보더라도 그냥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 습관이 된 듯합니다. 나이 먹은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지금 나이가 좋으니 어쩌니 해도 역시 젊은 날엔 비할 수 없지요.
추억의 그 둑길을 따라 달려간 스무 살은 이웃 마을에 들어섭니다. 우리 고향 마을은 동구밖 길이 불과 5~60m정도인데 이웃 그 마을은 대략 1km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곳도 구불구불하게 난 새벽길을 따라 그 집 앞에 도착합니다. 사전에 뭔가 약속한 것도 아니고 무작정 그 얼굴을 한번 봤으면 하는 막무가내 식으로 들이댄 것입니다. 그 집이 저쯤 보입니다. 벌써부터 가슴이 뛰어옵니다. 새벽길에 오가는 사람들도 보이진 않지만 꼭 누군가 지켜 보고 있는 듯합니다. 괜히 조바심이 납니다. 그 마을 입구에 있는 고목과 저수지를 지나면 곧장 그 집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땐 친구 집도 바로 옆에 있었는데,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굳게 닫힌 대문이 보이고 담장 너머 그 집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너른 마당엔 겨울 채소가 시든 채 보이네요. 물펌프는 가만히 멈춘 채 그렇게 있고, 창호지 문을 바른 방 두 개가 눈에 들어옵니다. 새벽 일찍이 무슨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면 좋겠다는 마음에 사전 약속도 없이 무작정 달려왔는데, 집안엔 아무런 기척이 없네요. 되돌아 나오는 골목길은 그냥 조용합니다. 다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나오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 봅니다. 고목나무와 저수지 풍경은 그때도 참 좋았습니다. 스무 살 때 새벽길 따라 무작정 찾아갔을 때 단 한번이라도 얼굴울 보았으면 하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아쉽고 허전한 마음으로 새벽길 따라 되돌아 오던 그때 강물 위엔 물안개가 곱게 피어올라 수양버들 사이로 부드럽게 나오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만나기 어려울 줄 알았다면 당시 그 집 앞에서 그녀가 나오길 끝까지 기다렸을 것을. 그때부터 좋아하던 노래가 바로 "새벽길"입니다.
낙동강 변 수박밭에서 일할 때도 이 노래를 많이도 불렀지요. 경운기로 밭을 갈 때도 기계 소리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제 노래를 잘 듣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기도 하였고요. 강 건너 봉화산을 빗겨 내려오던 저녁 노을이 강마을과 우리 수박밭, 그리고 강물 위를 발갛게 물들이던 날들 경운기로 밭을 갈면서 맨발에 느꼈던 그 부드러운 감촉도 이 노래와 함께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보리밭을 보면 40년 세월울 훌쩍 거슬러 올라깁니다. 정말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들판이 아닌 비포장 큰 도로 당시는 '신작로'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얼굴도 못 보고 집에 돌아올 때 벌써 일어나신 어머니께서 슬쩍 물어보십니다.
"야~야, 니 새벽 댓바람부터 일찌기 어디 이렇게 다녀오노? 지금 들에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이고, 강 건너 멍덤이 갔다 왔나. 아이믄 삼대 반쟁이 마을이라도. 배고프겠다. 얼른 밥 먹어라."
"아이다. 그냥 오토바이 한번 타고 싶어서 강가에 갔다 왔다. 금방 갔다 욌다 아이가. 안 그래도 배고프다. 밤 도."
이 마을들은 제 고향 마을 달성군 논공 위천리와 낙동강을 경계로 인접했던 고령군 성산면 마을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밥 도!는 우리 고향 마을에서 '밥 줘."라는 뜻입니다. 사실 나중에 동네 아지매들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제가 어딜 다녀왔는지 어머니가 다 알고 계셨다네요. ㅋㅋ.
보리밭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는 들판을 보면, 어머니와 나란히 쪼그려 앉아 호미로 김을 매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일부터, 하지 쯤이면 보리 타작할 때 땀이 가득한 온 몸에 쩍쩍 달라 붙던 보리가 우리를 짜증나게 하던 일도 떠오릅니다. 평소 무던한 성격이라 웬만한 일도 잘 참아내는 편인데 바짝 마른 보리가 도래깨질에 맞아 팡팡 튀어 제 몸에 달라붙으면 참기 좀 어려웠지요. 힘들지 않냐고 걱정하시는 어머니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짜증이 많이 났었지요. 그런 날들도 추억으로 살아옵니다.
보리밭 들길은 숱한 상상력 세게로 나를 끌고 갑니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의 근원이자 바탕이라 할 수 있는, 노드롭 프라이가 <신화의 세계>에서 썼던 '원형(原型), arcythipe'를 떠올려 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병아리들이 하늘에 위험한 매가 떠다니면 어미 닭 품속으로 뛰어듭니다. 어미닭조차 위험하기 그지없지만 병아리들은 위험을 감지하면 자신도 모르게 어미 닭 품속으로 피하려 하지요. 그때 병아이들에게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줬을까요. 아마도 어미 닭의 조상 그리고 그 위 먼먼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원형이 아닐까 하고 들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보리밭 들길 같은 시골에서 자라 세상 물정 모르고 일만 했던 시골 촌놈이 대학에 들어가 가장 처음 접했던 '신화의 세계'를 떠올립니다. 무한한 상상력이 문학의 원동력임을 강조하던 비평서였습니다. 비교적 난해하다고 평가를 받기도 했었답니다. 지금 보리밭을 보면서 어린 시절 추억에 더불어 노드롭 프라이의 저서까지 떠올리니 나이를 먹긴 먹었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