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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혼자 살아야 한다

손주들 올 때 좋습니다. 갈 때 더 좋습니다.

by 길엽

한창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시절 현직에서 물러난 선배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많았습니다. 그 선배들이 우리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해준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귀에 별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노년의 삶은 당시 우리들에게 아득한 세월 저 너머 언제 올지 모르는 먼나라 시간이었거든요. 그때 조언하시는 선배들을 놀리면서 술잔을 권하면서 쓸데없는 걱정하신다고 오히려 타박을 주기도 했지요. 저도 당연히 당시 또래들과 호흡을 맞춰 선배들을 놀리곤 했습니다. 봄여를가을겨울 사 계절이 흘러다고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간이 가는가 보다라고만 행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런 말을 하던 선배들 나이에 나도 모르게 도달했습니다. 그 선배들은 다시 저만큼 세월을 가득 안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십대 이십 대 청춘 때는 실감하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을 여실히 느낍니다. 시간이 왜 이리 빨리 흘러갈까요. 나이가 들면 건강, 경제력, 소일거리, 친구 등등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는 선배들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았습니다. 그 중에 친구 문제에 대해선 요즘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없는 친구를 이 나이에 억지로 만드는 것도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기는 것이지요. 물론 친구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당연히 좋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기 전에는 친구가 없는 노년의 삶은 끔찍한 줄 알았습니다. 그 당시 어느 친구가 나중에 내 곁에 있을까도 헤아려 본 적도 있습니다. 이젠 그런 것이 별 의미가 없더군요.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그렇게도 말합니다.


"지금 모임도 많이 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니까 친구 아쉬운 줄 모르는 것이지. 나이를 더 먹고 진짜 노인이 되면 친구가 없는 삶이 정말 외롭다네. 너무 자신만만하지 말게나."


저도 자신만만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친구가 없으면 당장 죽을 것 같이 외로울 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뿐이지요. 현직에서 물러나고 노년세대의 삶을 살아보니 지금이 오히려 여유가 있고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아진 듯합니다. 특히 뭔가에 구애받지 않고 책을 마음껏 읽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넷플릭스로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친구가 없는 삶을 충분히 대체해 주는 것 같습니다. 저의 잘못된 생각일까요.


낮에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출근하고 없는 집에 혼자 있다가 잠깐 외출하려 하는데, 옆 집 주인 아저씨도 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아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은 저보다는 한참 연배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오전에 인근 목욕탕에 가서 한나절 지내나고 오시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이랍니다. 친구들과 목욕하고 점심을 같이 먹는 어쩌면 단순한 일과인데도 노후에 최고 낙이라면서 웃으셨습니다. 가끔은 친구들과 내기 당구도 하시는가 봅니다. 전 당구도 카드도 고스톱도 골프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그런 것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을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겠지요.


이 분께 오후에 어딜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합니다.


"조금 있으면 설이라고 손자 손녀들이 올 텐데 야~들이 먹을 거리를 미리 사러 갑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 싸주려고 합니다. 용돈은 따로 준비해야 하겠지요. 손자 손녀들이 온다고 생각하니 한 달 전부터 기다려집니다. 댁에 3남매는 언제 결혼할지 기색이 보입니까?"


갑자기 우리집 3남매 결혼 소식 여부를 물어봅니다. 아직 전혀 없다고 답하니까 그 분께서 열심히 손주들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손주들이 오면 그렇게도 즣으시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저도 우리집 아이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온다면 정말 좋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러자 그 분 말씀이 이랬습니다.


"손주들 올 때 좋습니다. 그리고 다시 갈 때는 더 좋습니다."


너털웃음을 지으시면서 크게 웃었지요. 저도 덩당아 웃었습니다. 그 분께서 연이어 맥락과 영 다른 이야기를 끌어 갑니다. 나이가 들면 혼자살이에 적응해야 한다네요. 친구 있으면 좋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랍니다. 없는 친구 만든다고 애써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네요. 그 말씀에도 동의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오늘 오후엔 맥락도 없고 의미도 연관이 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루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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