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중 토요일 오후 혼자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렸다. 논발이 날리고 쌓여서 찻집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찻집에 홀로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저 멀리 창 너머 들길을 바라본다. 눈이 날리는 장면도 참으로 아름답다. 요즘엔 눈 내리는 풍경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어린 시절엔 왜 그리 추웠을까. 시골길을 따라 3km 여 비포장길을 눈속을 걸으며 겨울바람은 왜 그리 춥기만 했을까. 아침 먹고 달리다시피 하면서 학교에 가도 지각이 될 듯 아슬아슬했지. 멀리서 오는 아이들 심정은 전혀 이해해주시지 않은 선생님들은 왜 그리 매정했을까. 문득 형님의 당시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그때만 해도 내가 덩치가 적었다. 반면에 6학년이던 형의 덩치는 마을에서도 아주 큰 편이었지. 그때만 해도 대구로 진학하여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에 당당히 들어갈 실력이라던 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섯 살 터울인 나에게 한번도 격하게 말하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냥 나를 아껴주고 귀하게 여겼다. 둘이 말다툼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마을에선 우애기 깊은 형제라고 칭찬을 많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형의 성품이 무던했던 덕택이었지. 노름에 절어 있던 아버지 때문에 그 좋은 실력을 썩히고 말았지만.
어느 날 형과 함께 등교하는데, 내가 미적미적하다가 지각하게 되었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말이다. 교문에는 선도부가 대략 8명 정도 서 있었다. 지도 선생님도 당연히 계셨지. 교문이 저쯤 보이자 갑자기 형니 내 온몸을 확 움켜 쥐듯 안았다. 난 어중간하게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형의 겨드랑이에 푹 파묻혔다. 형의 동작이 의아했던지선도부 서넛이 우리에게 접근하였다. 형은 갑자기 그들을 오른 팔로 팍 밀치고 나를 안은 채 무지막지하게 달렸다. 형은 덩치도 크고, 힘도 셌다. 형은 나를 끌어안은 채로 교실로 마구 달려가고 선도부는 무섭게 따라오고. 건물을 휙돌아 나를 우리 교실에 내팽개치다시피하고 형은 다시 선도부들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선도부들은 나를 놓치고 말았지.
그리고 뒤따라 온 선도부들은 형의 뒤를 이곳 저곳 살폈다. 아마도 나를 찾는 것이겠지. 우리 교실 창문 너머 살짝 쳐다보니 형은 그 선도부들을 데리고 다시 교문으로 걸어갔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벌을 받았을 테지. 형은 그 일에 대해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국민학교 1학년 동생이 지각으로 벌받을까 봐 온몸으로 나를 지켜주었던 것이지. 선도부들이 형과 같은 학년이니 눈감아 주었을 수도 있고. 형이 공부를 워낙 잘 하니 선생님들이 대충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면 형님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만 기억하는 풍경이었을까.
요즘은 지구온난화 현상 탓인지 어린 시절만큼 춥진 않은 것 같다. 지금도 눈이 저렇게 내리는데 들길을 살짝 걸어봐도 썩 추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뜨뜻한 찻집에서 몸을 덥혔다가 나서서 그런 것일까. 찻집 너머 멀리까지 펼쳐진 들길에 눈 내리는 풍경이라니. 이런 풍경을 차 한 잔 놓고 이렇게 여유롭게 누리고 있다는 현실이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시골 찻집은 허름하다. 주인장 노부부도 뭐 그리 급한 것 같지 않다. 도시의 찻집에 비해 인심이 더없이 풍부하다. 고맙고 미안해서 테이크 아웃으로 블루베리 몇 잔을 더 샀다. 도시로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면 선착순으로 전해 줄 거다. 福많은 사람 순서로 마실 테지.
저 눈길 사이로 누군가 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이곳에 들러 차 한 잔을 시켜서 나처럼 여유롭게 저 눈 쌓인 들판을 바라볼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