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대학 동기 친구 하나가 저에게 " 니 욱하는 성질 있제?"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때 그 친구가 보기에 제가 그렇게 보였을 것이고 저도 당연히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동의하니까 그 친구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친구 말에 동의하지 않을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스무 살 대학 1학년 때 성숙한 나이가 아닐 때 그런 성질이 있다고 해서 큰 허물은 아니었지요. 물론 매사 그런 성격을 보이면 그건 곤란한 일이지요. 그 시절을 돌아보면 우린 시대 자체에 불만이 참 많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후문 근처 식당에서 5~60명 정도가 모여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면 모두가 시국에 대한 분석 전문가로 돌변하여 밤늦게까지 비판, 비난의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참! 대구 시내 공주 식당이라고 막걸리 한 되에 안주가 18가지 나온다고 소문이 난 곳인데, 대구백화점 뒤 으슥한 곳에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딱 한번 그곳에 갔었는데, 대학생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안주가 정확하게 몇 가지인지지 헤아려 보진 않았지만 눈이 휘둥그래질 만하게 많았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곳에 와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한다는 친구도 있었지요. 그것도 아득한 세월 너머 추억이 되엇습니다.
전두환 군부 독재가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80학변이었으니 당시 대학생치고 군부독재에 반감을 갖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대학 캠퍼스에 최루탄 가스 냄새가 가득 가득 했지요. 시국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없이 그냥 선배들과 함께 대형 스크럼을 짜고 대학 후문으로 밀고 나가고, 전경들은 맞은 편에서 최루탄을 무지하게 쏘아올렸지요. 눈물, 콧물 등이 범벅이 되어 캠퍼스 내 수돗가에 몰려 들어 가스 흔적을 씻어내던 날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당시 학생 운동권의 주류라거나 주요 인물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불의의 군부 독재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젊은 날의 피끓는 정의감에서 선배들과 함께 투쟁했습니다. 대학 후문에 있던 그 많은 식당들 속에는 시위를 마친 대학생들이 가득 들어 앉아 당시 운동권에서 널리 불려지던 노래를 합창하고 막걸리를 대형 짬뽕 그릇에 가득 담아 한 방에 들이켰던 날들도 생각납니다.
그런 날들도 한 때였던 것 같습니다. 대학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최전방 군부대로 입대한 다음 30개월 열심히 복무했지요. 어릴 때부터 어른이나 윗사람 말을 철석같이 듣고 따랐기에 군 복무 때도 지휘관들이나 고참들이 저를 많이 아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에는 학업과 취직에 전력을 기울여 대학 생활을 보냈지요. 군 입대 전에는 그래도 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제대 후엔 세상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강했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를 팔아서 대학 등록금을 만들어 준 형님과 형수님을 생각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대학 중앙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갈 때 비를 가득 맞고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며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부르던 시위대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을 순간 느끼긴 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진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교직에 들어와 35녀 간 평탄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교직 생활이 편했기에 동료들과 말다툼도 별로 하지 않고 두루 두루 원만하게 어울렸습니다.
이제 현직에서 물러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순간 순간마다 추억이 아닌 시기가 없습니다. 모든 시간들이 추억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아쉬운 순간도 많았고 기뻤던 날들도 슬펐던 때도 분명 있었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보니 누군가와 다툰다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더군요. 아내와 아이들도 정말 고맙게 느껴지고, 제 곁에 있어 준다는 사실에도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오랜 기간 저를 위해 헌신해 준 아내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아이들 3남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캥거루족이니 하면서 요즘 젊은 세대를 안 좋게 보는 시각도 우리 사회에 많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집에 같이 있어 주니 나이 많은 부모로서 정말 고마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경기도에서 혼잣 생활하는 막내아들이 가끔 집에 왔다 갈 때면 제가 돈을 봉투에 넣어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야, 00아 너도 이제 직장인이 되어 월급도 받고 생활하겠지만 이렇게 멀리 오가면서 잘 생긴 얼굴 보여 준 값으로 이 돈을 준다, 사양하지 말고 받아가거라. 오가는 데 차 조심하고 알았제. 주말에 집에서 쉬면 편할 텐데 부모를 생각해서 이렇게 먼 길 왔다 가니 미안키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
퇴직 후 돈 쓸 일이 별로 없어집니다. 물론 앞으로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아니면 급속도로 노쇠해져 병원 신세를 많이 지게 되고 돈이 많이 필요한 시기가 오겠지요. 지금 당장은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갑에 갖고 있는 돈을 꺼내 막내아들 가는데 차비하라고 전할 때 제 기분도 정말 행복해집니다. 이 나이가 되어 보니 남들과 다툰다는 거 정말 낯설기만 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님과 형, 여동생 이렇게 다섯이 만든 행복을 한껏 누리며 살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어머님은 살아 생전에 그야말로 온몸으로 희생하시면서 저를 키워주셨지요.
가끔 모임에 가면 후배들이 저에게 이렇게 물어옵니다.
"향님은 사는 것이 그렇게도 즐겁고 행복합니까. 늘 웃음이 입가에서 떠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연금 충분하지지, 건강하시지, 히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시지 저라도 형님 입장이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
그러면 제가 답합니다.
"난들 인생이 힘들지 않은 적이 없었을까. 사람들 겉으로는 모른다. 그들 가정으로 들어가 보면 누구든 힘든 점이 있을 것이다. 남에게 보이지 않거나 표시를 안 낼 뿐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당장 매우 힘들거나 한 것은 아니네. 지난 날 힘들어도 잘 견뎌낸 것이 아닐까 싶네. 그리고 요즘은 나이가 들어 보니 싸울 일도 적어지더라.. 체력이 떨어져서 그럴까, 아니면 삶에 대한 의욕이나 의지가 부족해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