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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이라도 따뜻하게

by 길엽

가끔 사람들이 언쟁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옛날과 달리 주위에서 언쟁하는 장면을 보는 것이 확연하게 준 것 같은데 그래도 간간이 보게 되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선 어른들이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고함을 고래 고래 지르며 싸움질을 많이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궁금합니다. 고향 마을 입구 쪽에 마을 회관이 있고 회관 내에 구멍 가게가 있었지요. 대부분 들판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꼭 한두 명은 낮 내내 구판장에서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회관 앞 큰길에서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뜻도 알 수 없는 말들을 고함과 함께 마구 뱉어냈지요.


제 아버지도 주민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것을 보고 제가 외삼촌과 달려 가서 아버지 허리를 끌어안고 그냥 집으로 온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외삼촌과 또 시비가 붙기도 했습니다. 귀한 여동생을 데려가 고생시키는 것을 본 외삼촌이 아버지를 좋아할 수도 없었기에 저는 외삼촌 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것도 못마땅하셨던지 이번엔 저보고 또 뭐라고 막 꾸지람하셨습니다. 제가 몇 마디 대꾸하면 아버지는 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온갖 불만을 쏟아내셨지요. 그러다가 들에서 돌아온 형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분위기를 진정시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왜 형에게는 저렇게 관대할까. 형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형이 뭐라고 하면 그냥 조용히 넘어갈까 의아했었습니다. 같은 아들 차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형은 장남 특유의 무던한 성격이어서 마을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반면에 아버지가 도박하여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것에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던 저는 아버지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자주 언쟁을 하였습니다. 형은 아버지께도 특별히 말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저에게도 이날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격한 말을 하거나 질타 같은 것은 안 했지요. 당시 마을 사람들이 '역시 장남은 다르네'하고 형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저대로 속상하기도 했습니다만 형에게는 서운한 마음을 절대로 갖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무능, 무책임이 용서되지 않았기에 아버지께는 대들었던 것이지요. 이제 부모님도 안 계신 세상에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니 저의 어린, 젊은 시절 아버지께 했던 행동이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하기만 합니다.


대신에 어머니께는 절대 효자였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인정하고 저도 그 점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 공부하는 목적과 이유도 단지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지요. 하지만 군복무 제대 2개월을 앞두고 55세 그 좋은 나이에 하늘 나라로 가신 어머니께 호강은커녕 제대로 효도를 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 어려운 농가 살림에 저 하나 공부시킨다고 온몸으로 희생하셔서 건강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살아 계실 적에 저를 유난히 이뻐하시고, 고교 시절에 대구에서 하숙을 할 때 어쩌다가 시골에 가면 어머니가 공부보다는 아들하고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좋아하셨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도 가끔 고향 마을에 가면 대구에서 오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계시던 동네 입구 버스 정류장 근처 너럭 바위를 떠올립니다. 그때는 새마을 비석 앞 편편한 바위 앞에서 기다리시기도 했지요. 제가 버스에서 내리면 어머니가 달려 오셔서 제 가방을 끌어 안으셨지요. 그땐 어머니가 어떻게 버스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게신가 신기했는데, 훗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고향 마을 회관에 들렀을 때 아지매들이 그 사정을 말씀해 주셨지요.


"아이고, 야~야, 촌에 일하는 기 얼마나 바쁘노, 그란데 느그 엄마가 니 오는 날 토요일이면 점심 먹고부터 들에 안 있고 대구에서 오는 버스 기다렸다 아이가. 그래도 니가 촌에 일 도운다고 3시나 4시쯤 왔제. 니도 서둘러 왔겠지만 느그 엄마는 한 1시부터 저짜 바우에 앉아 대구에서 오는 버스 다 기다렸지. 우리가 들에 왔다가 가다가 하다가 느그 엄마를 보고 일하러 안 가느냐고 물으면 대구에서 둘째 아~가 온다 아이가 카면서 니 기다렸다 아이가. 니 몰랐제."


어머니께선 세상 사람들과 언쟁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어머니를 매우 귀하게 생각하셨고, 특히 형수님들은 당신들의 답답한 마음을 어머니께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형님들이 서운하게 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머니께서 형님들과 각개격파 식으로 만나 형수님들이 곤란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좋은 말로 달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형님들이 어머니를 따르고 존경했기에 어머니의 충고가 잘 먹히기도 했습니다. 그때 꽃 같았던 그 형수님들이 이제 7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만나면 어머니 살아 생전 이야기로 한참 대화가 길어집니다.


언쟁 이야기가 갑자기 옆으로 새면서 어린 시절 추억으로 마구 달렸네요. 지금 이 나이에 무슨 언쟁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언쟁하는 장면을 목겨하는 경우가 좀 있지요. 며칠 전에도 언쟁하는 두 사람을 화해하기 위해서 각각 만나 각자의 생각을 들었습니다. A 말을 들으면 A가 맞는 것 같고, B말을 들으면 B가 타당하게 들렸지요. 그래서 제가 그 심정을 솔직하게 두 사람에게 밝혔지요. 저라고 사람간의 갈등, 헌쟁을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3자 입장에서 두 사람의 주장을 각각 들어보니 누가 옳은지 그른지 대체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판단을 전혀 밝히지 않았습니다. 둘 다 옳다는 식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대신에 이런 말을 둘 다 해주었습니다.


"저쪽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데요. 그래도 이런 점은 여기가 옳다네요. 자신의 잘못도 있답니다. 그 건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들은 두 사람 모두 얼굴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집니다.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갈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면 서로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상대방을 인정하는 멘트가 필요하다고 보았지요. 그것이 효과가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쟁은 대부분 자신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는 확신에서 상대방을 몰아세우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요. 같은 값이면 따뜻한 말을 하면 언쟁도 눈 녹듯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보니 그런 언쟁도 다 부질없이 느껴집니다. 그냥 상대방에게 따뜻한 망을 하도록 노력하면 있을 만한 언쟁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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