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초나라 항우와 진시황 사후 천하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유방의 출신 성분이 미천하여 그 휘하 장수들의 출신도 천민이 많았다. 반면에 초패왕 항우는 대대로 명문가 집안이었고, 항우의 군세는 유방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5년 초한쟁패의 끝 해하성 전투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가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유방이 항우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한신, 팽월, 경포 등이 차례로 토사구팽 당한다. 서한 삼걸이라 불리던 장량, 소하, 한신에 대해 유방이 이렇게 평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전선에서 승리를 결정함에 짐은 장량(張良)보다 부족하고,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량을 전선에 공급하는 것은 소하(蕭何)를 따를 수가 없소. 또 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것에는 한신(韓信)보다 못하오.“
장량은 한고조 유방이 천하의 승자가 되자 일찌감치 조정을 떠나 낙향하면서 권력 싸움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고 소하도 적절하게 처신하여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문제는 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불패장군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한신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의 창업 시에는 반드시 필요한 개국공신이지만 일단 개국하면 곧장 숙청 대상이 되어 버린다. 결국 한신도 팽월도 차례로 토사구팽당하고 마지막 남은 경포가 어줍잖은 반역을 일으킨다.
한고조 유방이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 또는영포(英布))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고향인 패현(沛縣)에 들러 고향 사람들에게 주연을 베풀었다. 경포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항우가 죽고 천하가 평정된 후, 원래 항우의 수하였던 경포가 한고조 유방에게 귀순하여 회남왕으로 봉해져 신하의 도리를 다하며 지내던 도중, 그를 모반을 도모하게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바로 고조의 황후 여태후가 양왕(梁王) 팽월(彭越)을 죽인 후, 그 시체를 소금에 절여 그릇에 담아 보냈기 때문이다.
여태후가 그전에 한신을 죽이고 연이어 공신 팽월까지 살해하였으니 경포 입장에선 당연히 다음 순서가 자신일 것으로 확신한다. 게다가 한신과 팽월 같은 맹장이 사라진 세상에 자신이 천하를 움켜잡을 수 있을 자신감도 가득했다. 결국 한고조 유방의 정벌군이 경포의 반란을 제압해 버렸다. 원래 이름은 영포였는데, 죄를 지어 이마에 먹물을 넣는 형벌을 받았기에 경포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어쨌든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하의 걱정거리가 사라졌기에 유방은 더 더욱 득의만만했다. 더욱이 고향 패현에 들렀으니 고취된 기분이야 오죽하겠는가.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 주흥이 돌자 천하를 손에 넣은 감회가 솟구쳤다. 패궁(沛宮)에 잔치를 벌리고 태공의 친구들인 부로들과 자제들을 불러 마음껏 술을 마시도록 했다. 이어서 패현의 아이들 120명을 선발하여 노래를 가르치고 술이 거나해지자 축(筑)을 타며 직접 노래를 지어 불렀다.
大風起兮雲飛揚
대풍이 몰아치니 구름 날아오르고
威加海內兮歸故鄕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도다.
安得猛士兮守四方
어찌하면 맹사(猛士)를 얻어서 천하를 지킬까
얼마나 흥겨웠겠는가. 농민 출신으로 천하의 황제 자리에 오른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고조 유방은 아이들에게 모두 대풍가를 따라 부르게 하더니 이윽고 흥에 겨워 자리에 일어 춤을 추며 강개한 마음에 마음이 움직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더니 패현의 부형들에게 말했다.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항상 그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비록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지만, 언젠가 죽게 되면 내 혼백은 내 고향 패현을 그리워하며 찾아들 것이오. 또한 나는 패공으로서 포학한 역도들을 주살함으로 해서 천하를 얻게 되었으니, 내 고향 패현을 나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아 이곳의 백성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대대로 없게 할 것이오. "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패현(沛縣) 풍읍(豐邑)에서 농민으로 태어나 진시황 사후 혼란의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 초대 황제가 된다. 젊을 때에는 건달 패들과 어울렸고, 나이 들어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이 되었다. 진나라 말기 진승과 오광이 난을 일으켰을 때, 시류에 편승하여 군대를 일으켰다. 유방의 나이 마흔여덟 살 때였다.
이후 초나라 명문가 집안 출신인 항량(項梁)의 군대에 합류하여 진나라 군대와 싸웠다. 반란군 중 유방군이 가장 빨리 진나라 수도 암양(咸陽)에 들어가 천하에 이름을 떨쳤친다. 홍문연에서 항우에게 주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장량의 지혜로 최고의 위기를 극복한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항량의 조카인 항우(項羽)와 천하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군세의 차이가 현격하여 몇 번이나 항우에게 패하여 궤멸될 뻔하였으나 휘하 장수들의 도움을 받아 끝내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손에 넣었다. 코는 높고 안면은 길어서 얼굴 모습이 용과 같았다. 멋있는 수염을 길렀으며 허벅지 안쪽에는 일흔두 개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유방이 지은 다른 시로는 <홍곡가(鴻鵠歌)>가 있다.
홍곡가(鴻鵠歌)
홍곡 높이 날아서 鴻鵠高飛
한 번에 천리를 가네. 一擧千里
지금 태자에게 사호(四皓)의 보좌가 있으니
홍곡의 날개를 붙인 것 같아 羽翮已就
사해를 단숨에 횡단할 것 같. 橫絶四海
사해를 횡단해 버리면 橫絶四海
어찌 하리오 當可奈何
비록 화살이 있어도 雖有矰繳
어찌 쏠 수 있으리오. 尙安所施
홍곡가는 유방이 여태후 소생인 태자를 폐하고 총애하던 척부인 소생 여의를 세우려 하다가 결국 포기할 때 불렀던 시가다. 유방이 조강지처 여태후 소생인 태자를 폐하고 총희 척부인의 어린 아들 여의를 새로이 태자로 세워려 하자, 여태후가 장량에게 부탁하고 장량이 당대 4현인을 초빙하여 폐태자의 부당성을 간곡히 간하는 바람에 유방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게 된 것이다. 여태후로선 장량이 진정 은인이었고, 반드시 보답해야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장량은 권력 세계의 비정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스스로 권력 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깊은 산골로 들어가 버린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유방이 척부인의 소망을 들어줄 수 없게 되자 척부인을 위로하면서 척부인에게 춤을 추게 하고 유방 자신이 이 홍곡가를 불렀다고 한다. 천하의 유방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유방 사후 여태후는 척부인을 잔인하게 처벌하는데, 두 눈을 뽑아 버리고, 귀를 멀게 하였으며 사지를 모두 베어 지하 창고에 방치하는 '인간돼지 인체(人彘)'로 만들어 버렸다. 후대 사람들이 여태후의 이 잔인한 보복을 들어 서태후, 즉천무후와 함께 중국 역사 3대 악처로 혹평하기도 하지만, 초한쟁패 5년 간 남편 유방과 헤어지고 시아버지와 아들 딸을 데리고 피난을 다녔던 여태후의 심정을 무작정 외면하긴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