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史記)』<魯仲連鄒陽列傳>에 백두여신 경개여고(白頭如新 傾蓋如故) 라는 말이 나옵니다. 풀이하자면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새롭고 낯설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가다 만나 잠깐 수레 덮개를 기울인 채 이야기를 나누고도 오랜 친구처럼 친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안 통하는 사람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나도 친해지지 않고 마음이 통하면 단 한 번을 만나도 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주인공 추양(鄒陽)은 제(齊)나라 사람입니다. 일찍이 양(梁)나라에 놀러갔다가 오(吳)나라 사람 장기부자(莊忌夫子), 회음(淮陰) 사람 매생(枚生)과 같은 명사들과 교우를 맺었지요. 추양은 사람됨이 지혜롭고 지략이 있었으며, 성격이 강개해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추양(鄒陽)은 양효왕(梁孝王)의 문객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 등의 무리에 끼게 됩니다.
그런데 양승(羊勝) 등이 추양(鄒陽)을 시기해 양효왕(梁孝王)의 면전에서 그를 모함합니다. 분노한 왕이 추양(鄒陽)을 관리들에게 넘겨 죄를 물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시기와 질투는 흔히 있기 마련이지만 벼슬살이에선 목숨을 날릴 정도의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지요. 어쨌든 추양(鄒陽)은 양(梁)나라에 놀러왔다가 참언을 받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옥에서 왕에게 글을 올립니다.
일명 <추양옥중상양왕서(鄒陽獄中上梁王書)>라 하여 명문장으로 일컬어집니다. 이 문장은『설원(說苑)』의 <존현(尊賢)> 편에도 나옵니다.『설원(說苑)』은 전한(前漢)말 유향(劉向)이 편찬한 책으로 고대로부터 한(漢)나라 때까지의 온갖 지혜와 고사(故事)와 격언(格言)이 풍부하게 실린 교훈적인 설화집(說話集)입니다. 그리고 <존현(尊賢)> 편은 어진 신하 현신(賢臣)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군주가 천하를 태평스럽게 통치하려면 무엇보다 현신(賢臣)을 존중하고 선비를 예우해야 된다고 하였으며, 그에 따른 역사적인 사례들을 열거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추양옥중상양왕서(鄒陽獄中上梁王書)>의 일부를 인용하였습니다.
“신은 충성심이 가득한 사람은 군주로부터 반드시 보답을 받고, 신실한 사람은 절대로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언제나 그렇게 믿었습니다. 옛날 형가(荊軻)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의협심을 존경했지만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였는데도, 연나라 태자 단은 오히려 형가를 의심하였습니다. 또한 위선생은(衛先生)이 진나라를 위해서 조나라의 장평의 승전을 묘사하고, 증원군을 요청할 때 하늘도 그 정성에 감동하여 태백성(太白星)이 묘성(昴星)을 침범하는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지만 진나라 소왕은 오히려 그를 의심하였습니다. 형가와 위선생의 정성이 천지와 자연 현상을 바꾸었건만 두 군주는 그들의 신의(信義)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신은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대왕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랐으나 대왕의 좌우가 밝지 못해 오히려 옥리에게 심문을 당하고 세상의 의심을 받게 되어 버렸습니다. 형가와 위선생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연나라 태자와 진소왕이 깨닫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중략>
속담에 ‘젊은 날부터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교제하더라도 마음이 안 통하면 새로 사귄 사람과 같고, 첫 만남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과 같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諺曰 有白頭如新 傾蓋如故 何則 知與不知也
양효왕(梁孝王)이 추양의 글을 읽고 감동해 그를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상객으로 맞이해 후히 대접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을 쌓게 됩니다. 단 한번을 만나도 믿음이 쏙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 만나도 정이 안 가는 사람도 있지요. 문제는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첫인상이 좋은데 시간이 갈수록 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보았을 때는 데면데면하다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진국인 사람도 있지요. 물론 위에서 말하는 백두여신 경개여고의 핵심 내용과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제가 비교적 긴 세월 살아보니 사람은 역시 오랜 시간 겪어봐야 하겠더군요.
지난 주에 저 개인적으로 큰 행사가 있었는데, 200여 명의 손님이 행사에 참석해 주었습니다. 요즘같이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특정 개인의 행사에 참석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그렇게 오신 분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여러 단체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모두 소중했지만 역시 3~40년 가까이 인연을 맺고 함께 지내온 우리 회원들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앞에서 그분들을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하더군요. 앞으로 두고 두고 감사에 보답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오랜 세월 인연을 맺은 사람의 정은 참으로 위대하거든요. 그렇다고 짧은 시간 만난 사람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연은 모두 소중한 것이니까요. 대신 서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사람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겠지요. 단 한번을 만나도 순수한 마음 가짐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상소문에서 추양은 “한쪽의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겨나고 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면 난이 생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