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내린 보슬비가 처마끝을 타고 대청마루 앞 섬돌에 날리던 날 어머니 심부름으로 보자기에 정성껏 싼 찹쌀떡을 전하기 위해 들렀던 이웃집에 아지매는 어디 가고 한 살 위 예쁜 누나가 정말 환한 웃음으로 보자기를 받아들었을 때, 마루에 잠깐이라도 앉았다가 가라는 그 예쁜 누나의 참으로 고운 목소리를 등뒤로 급히 날리고 내달려 돌담길 눈치없이 삐져나온 돌 피하려다 흙탕길에 살짝 미끄러져도 남이 볼까 얼른 일어나 우리집 작은방까지 뛰어들었습니다. 오른발 무릎 가운데 긁힌 자국에 피도 맺혔고.
우리 마을에선 제일 예쁘다고 모두 말했던 그 누나가 국민학교만 마치고 서울 어느 방직공장에 취직하여, 설 추석이면 정말 예쁜 옷을 입고 내려와 마을에 돈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명절 즈음에 우연히 골목에서 마주치면 마루 끝 마당 한 켠 채송화 위로 내리던 빗물에 실루엣처럼 비쳤던 그 순수한 소녀의 미소는 사라져 버렸었지요. 여전히 환한 미소로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지만 너무나 어색한 얼굴에 제 마음 속에 혼란이 생겨버려 나도 모르게 외면했던 날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국민학교만 졸업했지만 얼굴이 예뻐 어느 의사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마을에 무성했고, 그 예쁜 누나가 시집가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그 누나의 동생에게 전하던 날들도 초여름 비가 부드럽게 내렸습니다. 시골 마을에 떠다니던 소문은 대부분 헛소문임을 세월이 진짜 많이 흐르고 알게 되었지만, 어느 날 우연히 들른 고향 마을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그 누나의 참으로 힘든 인생을 샅샅이 들려 주었어도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너무도 친했던 광흠 아저씨는 충직한 이미지에 정말 성실하셨고, 당시에도 드물었던 고물상을 하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정말 겸손한 자세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막걸리 잔을 나누었습니다. 두 분이 막걸리를 드시다가 술이 떨어지면 그 아저씨는 정말 인자한 얼굴로 야심한 밤에 심부름시켜 너무나 미안하다며 두 되 짜리 막걸리 주전자를 건네 주며 막걸리 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어린 제 손에 꼭 쥐어 주었습니다. 골목길을 돌아 인적이 드문 밤길에 꽤 무거운 두 되 짜리 막걸리 주전자가 그날 밤에 유난히 출렁거려 귀한 술이 골목길에 내려 앉았어도 다시 한번 심부름 보내 미안타 하시며 제 손과 주전자 손잡이를 동시에 포근히 잡아 주셨습니다.
어쩌다 학교에서 상장이라도 받은 날이면 김칫국물 흔적이 배인 책보자기를 X자로 단단히 동여매고 3km 여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또 달려 어머니가 뙤약볕에 온몸이 새카맣게 일하고 계시던 들에 도착하고, 저 멀리서 혼자 하루종일 일하다 제가 오는 모습을 보고 밭머리까지 나오신 어머니께서 저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시지 않았고, 글자도 전혀 몰랐어도 제가 상장을 받아온 것은 신기하게도 알아채셨던 어머니 앞에서 상장을 읽어드리며 "~~~~~~금포국민학교장 박중쇠"라고 끝맺자마자 다시 이번에는 정말 세게 안아 주셨는데, 어머니의 땀과 흙이 옷에 가득 묻었어도 어머니 품속은 참으로 포근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어머니 곁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호미로 김을 맬 때는 제가 <조웅전>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드렸고, 어머니는 연신 제 얼굴을 따뜻하게 바라보았지요.
상장을 받아온 날은 어머니께서 아지매들을 집으로 불러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여 아들 상받은 것을 자랑하였고, 아버지와 광흠 아저씨는 아저씨네 마당 한쪽 평상에 자리하여 예의 막걸리를 나누시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술안주를 갖고 간 저를 보고 광흠 아저씨는 평상에서 그 큰 몸짓으로 마당으로, 맨발로 달려와 저를 앉아주시며 '야~야, 니 정말 잘 했데이. 느그 아부지 엄마한테 진짜 니가 희망이다. 진짜 잘 했데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또 큰돈을 제 손에 주셨고. 그렇게 우리 3남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던 광흠 아저씨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선 당시에 한학을 조금 하셔서 지역에선 그래도 배운 분으로 인정받으셨지만, 술과 도박으로 가정을 돌보시지 않아 어머니를 죽도록고생시켜 저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그로 인해 아버지는 저에게무책임, 무능력의 존재로 비춰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께 대들다 마당 한가운데서 버티고 선 채 지게 작대기로 사정없이 맞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형이 아버지 허리를 끌어안고 제가 도망가게 했지요. 그 좁은 마을에서 도망간들 어딜 가리오만 무당이었던 작은 이모댁에 피신한 채 하룻밤을 보내던 날 심야에 이모댁을 찾아온 아버지와 이모가 나눈 대화가 잠든 척한 제 귀에 그대로 들렸지요. 아버지가 저를 걱정하는 말을 처음으로 그것도 잠결에 듣긴 했지만 고마움이나 감동도 못 느꼈습니다. 훗날 동네 아지매가 알려 준 말씀. '그래도 느그 엄마는 느그 아부지를 좋아했고, 느그 아부지는 느그 엄마한테는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낙동강 변 수박밭 열일곱 살 원두막으로 수박을 사러 온 현풍여고 1학년과 첫눈에 눈이 맞아 온몸이 얼어버렸습니다. 모래사장 곳곳에 풀밭이 가득 가득한 곳에 우리집 착한 암소를 풀어놓았을 때, 원두막에 모여 있던 동네 후배들이 동시에 입나팔로 모아 "히~야, 누가 수박 사러 왔다. 여~ 와 바라."라고 하기에 맨발로 모래사장을 달려 들길에 올라 서둘러 달려간, 둑길 못 미쳐 넓은 들판에 우뚝 선 원두막에 나란히 앉은 동네 후배들이 내려다 보는데, 하늘색 손수건으로 머리를 묶고 예쁜 미소를 머금은 여학생이 나를 바라보던 날 냅다 수박 한 덩이를 안고 앞장섰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길게 난 둑길 위로 쑥스러워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수박을 가슴에 안은 남학생과 그 뒤로 뭔가 쫑알 쫑알 대며 따라가는 시골 여고생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 폭의 그림이 아니었을까요. 교련복 하의에 하얀 런닝셔츠 차림으로 여름방학 내내 까맣게 탄 얼굴의 열일곱 고교생은 세상 순진하였지요.
가을날이 오기 전에 수박밭에 남은 비닐들을 모두 뽑아내고 형이 경운기로 깊이 갈아엎은 흙덩이를 제 온 힘을 쏟아 나무곰배로 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얼힡 밭 두둑을 맨발로 찍은 곳에 배추와 무 씨앗을 적절하게 뿌려 넣다가 잠시 서서 바라본 강물 위엔 길게 내린 석양과 저녁놀이 잉어떼의 비상을 발갛게 물들였습니다. 강 건너 봉화산과 강마을이 그림처럼 다가오고, 청량하게 불어오던 강바람이 수양버들 숲속을 스쳐 지나와 아버지, 어머니, 형, 여동생 우리 식구 다섯의 귓가에 머물렀습니다. 가난해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 함께 한 우리 가족이 언제까지나 그런 저녁 부드러운 흙의 감촉을 같이 느끼며 살 줄 알았습니다. 저녁해가 넘어가고 온 들판이 어둑어둑해지면 근처에 일하던 아지매, 아재들이 집에 가자고 재촉하면 그제서야 우리도 농사 장비를 정리한 뒤 형이 운전하는 경운기에 모두 올라탔습니다. 운전하는 형 어깨 저 앞으로 벌써 나온 달이 오실재 고개 너머에 올라 우리들의 무사 귀가를 빌어주었습니다.
겨울방학 내내 떼로 몰려 다니며 칼싸움, 닭싸움, 동네숨바꼭질, 비사치기, 자치기, 썰매, 노루궁디, 겨우내 나무하기, 들판 횃불들고 무우 캐먹다 무장공비 경찰신고 당하기 등등 제 고향 시골마을 달성군 논공면 위천1리 우나리의 시공간은 제 유년의 추억으로 가득 가득 남아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며 내 삶의 대부분을 참으로 풍요롭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아름답던 시절,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냥 모든 사람들이 좋았던 그때가 한없이 그립습니다. 함께 뛰놀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하나 둘 곁을 떠나 사라져갔지만 추억의 그곳은 여전히 그대로 앉아 가끔씩 찾아가는 저를 정말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숱한 그리움은 사랑입니다.